▲'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경남지역 유족회' 대표와 회원들은 5월 11일 오전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실규명과 위령사업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윤성효
국가범죄에 의한 피해 구제할 보·배상 특별법을
즉 국가가 불법으로 사람들을 죽여놓고, 이후에도 수십 년간 연좌제의 멍에로 신음해온 유족들이 이 문제를 발설하는 것조차 겁박을 하고 또 유족회 활동가들을 처벌까지 해왔는데, 이제 와서 왜 사건 직후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았느냐고 적반하장 격으로 따지면서 시효가 지났으니 당신들은 권리주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고등법원의 판결이 상식과 현저히 거리를 둔 것이라면 대법원의 판결은 크게 환영할 만하다. 따라서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여 평생 한을 품고 살아온 유족들에게 비록 적은 액수라도 국가가 뒤늦게 자그마한 위로를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판결을 지켜보는 우리는 제3자로서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든다. 즉 그렇게 많은 피해자들이 일일이 자기 돈을 들여서 소송을 하고, 법원이 건 별로 판단해서 피해자에게 보상조치를 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과, 전쟁 중이라고는 하나 그렇게 수십만 명의 인명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반인도적 범죄의 책임자에 대한 형사적 단죄가 왜 없는가라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범죄의 피해자에게도 민사상의 채권자-채무자 관계의 규칙을 적용하고 있는데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특히 이처럼 국제법에서 통용되는 반인륜적 범죄에 해당하는 학살사건에 대해 민사상의 채권-채무관계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심히 의심스럽다.
국가폭력에 의한 가해 사실과 피해 여부는 국가가 직접 조사해서 인정한 다음 피해자의 신청을 받아서 심사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법원에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고, 스스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즉 국가는 중요 범죄의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가 주장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겠다는 극히 오만한 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당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전국적으로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개인별 구제를 신청해야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것처럼 이런 중요한 집단학살사건은 법원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모든 피해를 일괄 구제하기 위한 별도의 보·배상 관련 특별법이 필요하다.
반인도적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와 역사 바로쓰기마지막으로 이승만정부하의 군 정보국, 헌병, 경찰 치안국 등 주요 권력기관이 모두 관련되어 있는 이 학살사건에 대해 당시 관련자는 거의 사망했고 공소시효도 지났기 때문에 실정법상으로 그들을 단죄하기는 어렵지만, 역사적 면죄부까지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정부 들어서 이러한 국가범죄는 완전히 묵살되어버리고 이승만의 나라세우기를 미화하거나 백선엽 전쟁영웅 만들기 등 '현대사 바로잡기'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는데, 이는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를 두 번 죽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엄청난 반인륜 범죄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국민 교육 없이 유족 개개인을 민사상으로 보상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국제인권규범을 적용해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매우 환영할 만하지만, 향후 이 소송의 향방은 국가의 잘못된 공권력 집행에 대한 피해 국민의 명예회복 여부,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의 인권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추가적인 법적 장치 마련, 역사 바로 쓰기 작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창비주간논평>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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