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출처는 중학교 <국사>. 그림 우측 상단에서 백마를 타고 지시하는 인물이 광개토태왕.
교육과학기술부
국제관계의 일반적 패턴, 그것에 비추어보면...이 같은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일반적 패턴으로부터 우리는 A 구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패려족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공격을 개시했다는 A 구절의 내용을 고려할 때, 우리는 패려족이 신하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이 군사행동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비문에 나오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징토하였다"라는 부분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징토'란 표현에 주목해보자. '징벌'이라 아니하고 '징토'라 한 것은 왜일까?
맹자는 <맹자> '고자' 편에서 "천자는 징토하되 징벌하지 않고, 제후는 징벌하되 징토하지 않는다"(天子討而不伐, 諸侯伐而不討)고 했다. 군사적 응징의 주체가 천자인 경우는 토(討) 즉 징토란 표현을, 그 주체가 제후인 경우는 벌(伐) 즉 징벌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토'와 '벌'을 묶어 '토벌'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두 표현을 세심하게 분리해서 사용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을 제작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토'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구려가 천자 즉 상국이고 패려족은 신하국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신하국이라고 하여 국가적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19세기말에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이 누차 천명한 바와 같이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이면서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나라였다. 또 여진족 금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든 중국의 송나라(남송) 역시 독립성과 자율성을 향유했다.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를 형식상 평등하게 취급하는 현대 서양식의 국제관계와 달리,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는 영토나 경제력 혹은 군사력에 따라 국가의 위상을 차별했다. 큰 나라는 크게 취급하고 작은 나라는 작게 취급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상국이냐 신하국이냐'는 것은 '독립국가냐 아니냐'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강한 나라냐 아니냐'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패려족이 고구려의 신하국이었다는 표현 역시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패려족에 대한 응징을 결심한 광개토태왕은 꽤 과감한 방식으로 군사행동을 단행했다. 패려족과의 국경지역을 공격해서 이를 점령하는 방식을 취한 게 아니라 패려족 영토의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가면서 쭉 훑고 나오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군사적 자신감이 없었다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방식이다. 점령이 아니라 응징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태왕의 원정군은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거쳐 염수(鹽水)까지 밀고 들어가서 3개 부락의 600~700개 영(營)을 격파한 뒤에 수많은 소·말·양떼를 빼앗았다. 고구려 원정군이 지나간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오늘날 우리의 지리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신채호의 연구성과를 빌리기로 하자.
고구려에 복종하지 않으면 살 길 끊겠다는 강력 의사 표현신채호는 17세기 중국의 저명한 고증학자인 고염무가 편찬한 <수문비사>를 근거로, 부산(富山)은 음산산맥의 와룡산(臥龍山)이고 부산(負山)은 중국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고 했다. 그는 또 몽골 지리에 관한 참고서인 <몽고지지>를 근거로 아랍선산 밑에 있는 길란태(吉蘭泰)라는 호수가 비문 상의 염수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