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 크레인, '해고는 살인이다'
이선옥
정문 안쪽 마당에서 바로 도착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창수 열사의 아버지, 백기완 선생, 문정현 신부가 정문 위 담장에 올라섰다. 열사를 자식으로 두었거나, 시대의 열사들을 가슴에 묻은 팔순의 어른들이 담장 위에 올라 열변을 토한다. 길 위의 신부는 담장 위의 신부가 됐고, 길 위의 투사들은 담장 위의 투사가 됐다.
집회 대열 끄트머리에 낯익은 얼굴이 앉아있다. 쌍용자동차의 계영휘 조합원이다. 77일 동안 공장 안에서 옥쇄파업을 벌였던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지금 한진중공업의 상황이 남 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희망버스를 보니 가슴이 벅차면서도 벌써부터 떠날 일이 걱정이라고 했다. 남겨진 자들의 처절한 고립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감동과 걱정이 교차하는 얼굴로 77일간 벌였던 자신들의 옥쇄투쟁을 다시 떠올린 그는, 이기는 길은 연대뿐임을 거듭 거듭 강조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지요. 우리는 절망이었는데 여기는 희망이 보이니까. 한진은 그래도 김진숙 동지가 구심점이 되니까 다행이에요. 행복한 데죠. 우리 때도 전국서 버스가 왔을 때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벅찼어요. 이게 연대구나! 우리가 이 투쟁 이기고 현장으로 돌아가면 꼭 연대를 실천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우리는 졌지만 신과 의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마음으로 되새기고 되새기고 했어요. 그런데 이 희망버스가 하루천하가 될까 걱정이에요. 계속 연대해줘야 하는데, 안 건드린 것만 못하게 될까봐. 그 끈을 놓으면 이 사람들 다 죽어요. 정치인들이야 입지 세우고 가면 그만이지만, 떠나고 나면 남은 사람들이 걱정이죠." 조업을 멈춘 널따란 조선소 안에는 조립을 기다리는 자재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회사는 수주 물량을 필리핀 공장으로 빼돌리고, 흑자 공장인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더 이상 정리해고를 하지 않겠다고, 김주익과 곽재규가 죽었을 때 약속했던 회사다.
170억이 넘는 배당금으로 경영진은 돈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허깨비 같은 주식놀음, 그들의 금고에 천문학적인 숫자로 쌓여가는 돈을 위해, 심장이 뛰고 살갗이 만져지는 실제 인간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긴 50대 가장을 한 대에 200만 원씩 주고 매로 '다스리는' 존재들이니, 그 눈에 노동자들이 사람으로 보일 리 없다.
"1570일을 견뎌서라도 꼭 이기겠다"는 그 여자집회를 마치고 드디어 그 여자네 집으로 간다. 정문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85호 크레인, 그녀의 집이다. 천천히 걸어 집 아래에 도착했다. "사랑해요 김진숙"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저 멀리 하늘 위에서 그녀가 쌍용자동차의 남편들처럼, 한 점 불빛으로 화답해준다.
그녀는 희망버스를 타고 온 우리를 하늘 위에서 뜨겁게 안아 주었다. 몇날 며칠 동안 가슴 설레며 우리를 기다렸다고 한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왔다"고, 그녀는 예의 그 투박한 목소리로 가슴 절절한 환영사를 낭독했다.
그녀의 인사말은 한 글자도 버릴 게 없다. 피멍 든 가슴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입사동기 박창수의 죽음을, 소 같이 우직했던 김주익의 죽음을, 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곽재규의 죽음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그 천금 같은 동지들의 죽음을, 신열처럼 달고 사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2003년 11월 16일, 나는 김주익과 곽재규의 장례식 현장에 있었다. 85호 크레인 아래를 가득 메운 조합원들이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꺼억꺼억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던 그 현장에서, 김진숙이 말했던 누더기 같은 작업복을 입은 초라한 아저씨들의 고통스런 의식을 지켜보았다.
129일 동안, 한 사람만 곁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김주익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진작 이렇게 모였더라면 곽재규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가슴 대신 땅바닥을 치며 시멘트 바닥에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소금꽃나무들을 보았다.
김주익과 곽재규의 목숨 값으로 그들은 복직이 되었고, '남한 최고의 단체협약'을 따냈다. 박창수가 죽어 민주노조를 지켰고, 김주익과 곽재규가 죽어 정리해고를 막았다. 비루한 목숨들은 살아남아 평생 죄인이 되었다.
오늘 환영사도 역시나 그 남자, 김주익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8년 전 한 달 넘게 봉쇄된 공장이 마침내 뚫려 사람들이 이 85호 크레인 밑에 모이던 날, 감격으로 울었던 그 소 같은 사람을 끝내 지키지 못한" 회한을 먼저 꺼냈다.
"귀때기 새파란 용역들한테 짓밟히는 조합원들에게 우리가 외롭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기를 쓰고 버텨온 가여운 조합원들에게 희망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가 목숨 던져 지켜낸 바로 그 사람들, 저들은 나를 버린다 해도 나는 저들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백 가지도 넘는 사람들을 함께 지켜달라"고 했다.
누군들 눈물 없이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으랴. 그저 소박하고 단란했던 그들의 일상을 다시 돌려주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이 담에 죽어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를 만날 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고픈 그녀의 마음을. 157일 아닌 1570일을 견뎌서라도 꼭 이기겠다고, 웃으면서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그녀의 다짐을, 누군들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으랴.
김주익 죽고 8년,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으로 질기게 싸운 그들 덕에 그녀는 오늘 '박종철 인권상'을 받는다. 새벽 4시, 줄에 묶여 올라간 트로피를 받아든 그녀는 하늘 위에서 "상 받으니까 좋다!!"며 함박 웃고, 날라리들은 그녀의 집 아래에서 한판 난장을 벌이기 시작했다. 공장 안은 해방구가 됐다. 밤새 신나게 노는 우리를 저 위에서 지켜보며 그녀가 웃는다.
우리가 2차 희망버스에 올라타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