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국기와 포탈라궁 사진이 붙어 있는 '포탈라'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근혜씨.
권우성
- 남편 민수씨와 어떻게 만났나?
근혜 : "매해 전국노점상총연합(전노련)에서 아버지를 추모했기 때문에, 2004년 인사하러 갔다. 그때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사무실에 이주노동자노조에서 일하던 남편이 자주 들렀다. 그때부터 알게 됐다. 남편은 그때 내가 자기를 꾄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웃음)"
- 민수씨는 2008년 4월 서울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유 티베트'를 외쳐 이름이 알려졌다.민수 : "티베트 망명 2세로 네팔 카트만두에 살았다. 시위로 15일 동안 감옥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거창한 활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1998년 한국에 와서 공사판 등을 전전했다.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2008년 3월 티베트 유혈 사태(중국 경찰이 반중국 시위대를 강제 진압해 수십 명이 사망한 사건)를 접했을 때, 가슴이 울었다."
근혜 : "유혈 사태가 일어난 날, 남편이 티베트 친구 3명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다들 티베트 라싸에 있는 가족과 전화가 안 된다고 울먹였다. 이를 계기로 민수씨가 티베트 친구들에게 연락해,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촛불 시위를 하게 됐다."
- 당시 경험이 포탈라 레스토랑을 만든 계기가 됐나?민수 : "티베트에 대한 관심이 2달 지나니 줄어들었다. 티베트 현실을 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다. 그래서 한국에 없는 티베트 음식점을 열자고 생각했다."
"강제 철거는 아버지 목숨 값을 잃는 것"- 돈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겠다.근혜 : "2007년 아버지의 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1억4000만 원을 받았다. 최저임금으로 계산한 아버지 목숨 값이었다. 이 돈 중 빚을 갚고 전셋집을 구하는 데 쓴 돈을 빼고 1억 원가량으로 2008년 6월 가게를 열었다. 남편은 남는 시간 부업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민수 : "여러 문제로 티베트인 주방장이 그해 말까지 도착하지 못해서, 몇 달간은 제대로 된 영업을 못했다. 또한 금융위기가 터져 정말 어려웠다. 운영비가 부족해 지인들한테 돈을 빌려 가게를 꾸렸다. 시설 투자비를 합쳐 포탈라에 들어간 돈만 2억4000만 원이다."
- 사실 티베트 음식은 생소하다. 근혜 : "생소한 음식이라 손님을 끌어들이고 단골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사가 안돼 가게를 팔 생각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유일한 티베트 음식점으로 알려져, 그나마 장사가 잘됐다."
이들 부부에게 행복은 잠시였다. 명동 2·3·4 구역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명동 3구역은 4월부터 철거가 이뤄졌고, 14일 상인들이 카페 '마리'를 점거해 농성을 벌이고 있다. 포탈라가 있는 명동 4구역의 경우, 4월 25~26일 가게 15곳에 5월 31일까지 가게를 비우라는 통고문이 날아들었다.
- 3구역 철거될 때 어땠나?근혜 : "지난 4일 3구역에서 2차 강제 명도(철거)가 있던 날, 그곳 상인들과 함께했다. 400명의 용역직원들이 상인들의 가게를 강제로 철거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울었다. 힘이 없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구나 싶었다."
- 그 후, 직접 명도 통고문을 받았을 어땠나?근혜 : "이제 장사가 잘되려는데 내쫓긴다니 큰 충격이었다. 철거는 아버지 목숨 값을 잃는 것이다. 딸 새옴이(5살)와 아들 대옴이(14개월)를 어떻게 키워야 되나 걱정이 컸다."
민수 : "2007년 5월 결혼 이후, 신혼집이 철거된 것만 4번이다. 돈이 없어 재개발지역에서 집을 얻은 탓이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을 만난 적도 있고, 철거 현장에 많이 가봤다. 철거민들은 정말 힘들게 싸웠다. 통고문을 받았을 때, 정말 막막했다."
"한국에서 살기 왜 이리 힘드나? 용삼 참사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