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질문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문성근 대표
김민경
- 10대 문성근은 어땠나?
"부모님께서 굉장히 자유롭게 놔두셨다. 네 삶은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식으로 하셔서 덕분에 철없이 놀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식화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서강대 무역학과를 진학하게 된 것은, 대학입시 시험이 끝나고 당시 '진학'이라는 잡지에 나온 시험 점수표 때문이다. 내 점수로 진학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입학 후 금방 큰 후회에 빠졌다. 재미가 없고 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요즘 우리 교육이 '남을 누르고 올라가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10대들이 때때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할지 생각해보고 스스로 정리하면서 살면 인생의 시행착오가 줄어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나의 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힘들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지켜나가고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 부모님이 자유분방하게 키워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자유로운 '문성근'이 존재하는 건 아닌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한 근원이 되었을 수는 있다. 지금 '국민의 명령'을 통해 길거리 '민란'을 하는 것도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직업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된 작업이기 때문에 국가 체제, 정당 등을 이리 저리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기존의 정당 체제에서 왜 벗어날 수 없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를 두고 자라면서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는다면 무엇이 있는지 듣고 싶다.
"대학교 2학년 때 연극을 했는데 어느날 술 자리가 있어서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문제는 내가 술이 약해서 필름이 끊어지는 타입인데 다음 날 일어나니 누나가 "어제 너 집 앞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을 아버지가 업고 들어오셨다"고 하더라. 아침 밥상에서 아버지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고 나도 그랬다. 또 기억에 남는 건 83~84년쯤 아버지께 "고문당한 적 없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한 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고문 위협도 받아 본 적 없으시냐?"고 하니까 "물론 있지" 하셨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취조에 협조하지 않자 지하의 고문실을 보여주며 조사관이 "협조하지 않으면 여기서 애들과(고문담당자) 며칠 지내셔야 됩니다"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래라"고 하셨다. 만약 고문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기색이 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겠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러라고 하는 자세를 보고 조사관이 "올라가자(위층의 조사실로)"고 했단다. 1, 2분의 짧은 이야기였는데 이때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렸던 이미지가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 아버지의 '일'로 인해 고통 받거나 힘들어서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는지.
"전혀 없었다. 원망이나 이런 것은 있을 수 없고 당신께서 당신의 삶을 온전히 던져 일을 하시는 것이고 내가 워낙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계셨기에 내가 도와드리지 못해 늘 죄송했을 뿐이고 원망해 본 적은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적지 않긴 했다. 가령 아예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이것이 배우할 때인 6공화국에서도 방송금지와 같은 형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수준이라서 그런 것을 어쩌겠나. 김미화, 김제동과 같이 특정 정파의 이익에 맞지 않다고 '생업'을 끊으려는 시도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다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아서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원망스러운 것이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문성근의 아버지'의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역사에 환원하겠다는 의지의 투영인가 ?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문 목사는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활동하시던 분들과 동지였고 많은 사람들이 '문목(문 목사)'이라고 부르고 기억하신다. 또한 역사 속의 한 인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언급하는 것이 대화하기 더 편하기도 하다."
- 대학에 다닐 때가 시대적으로 '권위적'이었고 이에 항거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어땠나 대학생 문성근은?
"내가 72학번인데 이때가 유신 때다. 이때는 '플래카드'를 꺼내려고 하면 잡아갔고 잡혀가면서 비명 몇 번 지르는 정도였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나의 경우는 민주화 운동에 '전혀'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로 참여한 것이 없다. 아버지의 삶을 보고 내가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했었다. 대신 구속된 사람의 가족으로 구속자를 위한 활동은 조금 했다.
1980년 '내란 음모 사건' 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전원이 구속 상태였고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언도된 상황이었다. 이때 구속자 당 두 명이 들어가서 재판을 참관할 수 있었는데 이때 기록할 수 있는 도구는 어떤 것도 지참할 수 없었다. 참관을 하고 나와서 그 내용을 문서로 기록하고 밖에 전달하는 일을 내가 했고 구속자 가족의 의견을 도합해서 '성명서'를 만들어 전달하는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때는 한겨레를 제외한 모든 신문에서 문 목사를 맹비난하고 있었고 문 목사를 변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위해 문 목사의 방북 성과와 목적,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을 통해 약속된 내용 등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을 했다. 이런 일들 외에는 하지 않았고 2001년 '스크린 쿼터 사태'에 영화계가 공동 대응할 때 비로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 20년 혹은 30년 전의 과거 문성근이 현재 문성근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나?
"(한참을 뜸들인 후) 뭐… 그렇게 즐겁게 보지는 못 할 거다. '어쩌다가 저 인간 저러고 살지?' 이런 생각 할 거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내 인생의 흐름이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쳐 지금의 내 모습과 활동이 있는 것이니까 안타깝지 않을까 싶다. 이는 단순히 내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더 원만하게 진행되어 왔다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안타까울 것이다."
배우, 스크린 쿼터 그리고 노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