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을 받는 초등학교 어린이들
안양시
왜 부자에게까지 급식을 주는가? 실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다. 베풂을 주는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 베풂을 받는 사람들의 굴욕이 눈에 밟혀서다. 보편적 복지의 핵심원리는 '책임(기여)은 능력껏, 혜택(수급)은 누구나'다. 후자의 '누구나'는 오 시장이 목 놓아 외치듯 '부자에게 퍼주는 복지'를 행하자는 취지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복지수혜를 받는 자의 굴욕과 부끄러움을 헤아리는 사려 깊은 마음 씀씀이에서 시작됐다. 이 고귀한 정신은 복지를 바꿨다. 현대적 의미의 복지는 부자들의 '영웅적 선의'에 의해 베풀어지는 시혜가 아니다. 빈자들도 당당히 누려야할 사회적 권리로 격상됐다. 이런 '사회권적 기본권'은 서구 복지국가들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원칙이기도 하다. 우리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분명히 명시했다.
이처럼 모두에게 제공하는 복지의 기저에는 '권리보장'이란 뜻이 깔려있다. 우리는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을 보장한다. 20세기의 과제였다. 그러나 투표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될까? 아니다.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실질적 민주화, 실질적 자유는 소득·계급에 관계없이 인간답게 살 정도의 복지는 시민권으로서 보장할 때 달성된다. 21세기형 민주화운동이다.
오 시장을 비롯한 보수진영은 여전히, 아마도 영원토록 '복지는 시혜'란 인식에 쪄들어 있을 게다. 그들은 복지를 권리로서 누린다는 개념을 이해 못한다. 탐탁치도 않아 한다. 저 히스테리적인 포퓰리즘 공세를 보라. 국민들이 헌법에 명시된 복지권을 인식하고, '미뤄뒀던 권리'를 정치의 장에서 행사하려는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해보려는 발버둥 아닌가.
그럼에도 계속되는 의문. 부자 자녀들도 공짜로 밥을 먹는 건 어찌됐든 낭비 아닐까? 앞에서 설명한 보편적 복지의 원리 중에는 '책임(기여)은 능력껏'이란 전제도 함께 있었다. 스웨덴의 '부자 스피드광'이 스위스 고속도로에서 과속했다가 무려 12억 원의 벌금을 낸 사례는 유명하다. 최고한계세율의 경우에도 스웨덴은 59.09%(우리는 35%)에 달한다.
복지국가에 사는 부자들은 무상으로 급식이나 교육을 받을지는 모르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물론 중산층 이하 서민들도 능력껏 세금을 부담한다). '되로 받고 말로 주는' 꼴이다. 우리의 경우도, 무상급식 정도야 현재의 제정구조 하에서도 합리적인 조정을 통해 실시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보편적 복지제도 도입이 논의될 경우, 증세 등의 재원마련 방안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될 것이다.
지속가능한 복지 위해서도 부자까지 포괄해야부자까지 복지제도에 포괄하는 이유는 더 있다. 보편적 복지는 중산층·부자들의 '반복지' 정서를 완화한다. 이는 복지제도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 빈자들을 위한 복지에만 세금이 집중되면, 대다수 중산층·부자들의 조세저항이 극심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경제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봉착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들과 별 관계가 없는 복지부터 줄이자는 요구가 빗발치고, 사회갈등은 심화될 것이다. 복지는 확고한 제도로써 존재하지 않고, 시혜와 자선의 영역으로 고착화되리란 건 불 보듯 뻔하다.
반면, 모든 국민이 참여해 능력껏 재원마련에 기여하고, 필요에 따라 수혜를 받는 보편적 복지제도를 설계한다면? 결과는 다를 것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단일한 제도에서 함께 '복지열매'를 향유하기에, 조세부담에 대한 저항도 상당히 수그러들게 된다. 더불어 복지는 일시적인 구호가 아닌, 튼튼한 사회제도로서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복지를 보편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선택, 맞춤형 복지를 해야 할 분야도 많다. 보편·선별복지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현재 한국의 극악한 사회조건을 보자. 그간 취해왔던 '경제성장-선별복지' 패키지의 처방은 효력을 잃었다. 그래서 제기되는 주장이 필요한 분야에는 보편적 복지제도를 과감히 도입해 체질개선을 꾀하자는 거다.
이 과정에서 첫 타자로 무상급식이 등장했다. 이런 시대조건의 변화를 도외시한 채, 오 시장은 '무상급식=부자복지, 선별급식=서민복지'란 궤변만 반복하고 있다. 생산적인 논의를 할 것도 부지기순데, 보편적 복지가 부자복지가 아니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론을 펴는데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심정, 답답할 따름이다.
오 시장에게 정중히 요청한다마지막으로 요약해보자. 엄격하게 조세정의를 적용해, 특히 부자들의 높은 세금부담을 의무화한다. 빈자를 포함한 전 국민은 낙인 없이 권리로서 제도화된 복지를 제공받는다. 이런 형태의 보편적 복지를 과연 '부자를 위한 복지'라 칭할 수 있을까?
주민투표에 나서는 건 좋다. 성사된다면, 서울시민으로서 적극 참여하겠다. 단, 평소 '복지시장'을 자임하는 분으로서, '부자무상급식'과 같은 격에 맞지 않는 주장은 이쯤에서 거둬주기를 오 시장에게 정중히 요청한다.
덧붙이는 글 | 아마도 오세훈 시장은 민주당에서 재원마련대책에 대해 속 시원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어 더욱 강하게 '퍼주기 부자복지' 공세를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상급식 정도는 증세 없이 합리적인 예산조정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민주당보다 더 '정통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복지세력들은 누진적·연대적 증세, 부유세, 사회복지목적세 등과 같은 재원마련방안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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