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연합, 북한민족해방전선 등 탈북자단체 회원들이 4월 29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대북전단을 살포하기 위해 준비하는 가운데,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과 지역주민들이 임진각 2층에서 '대북전단살포 중단하라!' 'PEACE'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권우성
우리는 화염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남북관계 속에서 6·15공동선언 11주년을 맞는다. 2000년 남북 정상이 적대와 대결을 종식하고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로 약속한 뒤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노력하기를 8년, 남북관계에서는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의 절대적 기준을 내세우며 그에 미치지 못하면 변화가 아니라고 우기는 이 말고는 휴전선에서 총격전이 사라지고 서해상에서 남북교전을 방지하기 위한 신호체계가 작동하며, 남북간 도로가 뚫리고 개성공단에서 수만명의 북한 근로자가 대한민국 제품을 생산하게 된 현상에 대해 변화가 아니라고 강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6·15에서 10·4선언으로 이어지던 시절, 우리는 포용정책의 일관된 추진을 통해 동족상잔의 전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공동번영의 남북관계 구축의 가능성을 보았다.
'평화관리자'에서 '분쟁당사자'로의 위상 추락그러나 이명박정부 출범 3년 4개월이 지난 오늘 최악의 남북관계 속에서 국민은 전쟁을 걱정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일상화된 안보불안 속에서 국민의 '삶의 질'은 형편없이 퇴락했으며 남북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 증진과 공동번영의 꿈은 퇴색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국제사회에서 평화관리자로 부상했던 대한민국은 지금 없다. 대신 남북대결로 발생한 군사적 긴장을 일방적인 한미동맹 강화로 풀려 함으로써 동북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북한과 앙갚음 게임(tit-for-tat)이나 하는 '분쟁당사자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동북아에 길게 드리워졌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한반도 정세의 비극적 변화는 근본적으로 이명박정부가 6·15공동선언의 계승을 거부하고 포용정책을 부정하며 대북 대결정책을 펴면서 발생했다. 그 결과 6·15를 거부한 이명박정부의 지난 통치기간은 역설적으로 6·15정신에 기초하지 않고는 한반도 문제가 한 치도 진전할 수 없음을 입증한 시기였다.
6·15의 의미는 남북관계를 적대에서 화해협력으로 바꾸기로 하고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전기였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6·15는 남북관계를 넘어서 포괄적인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라는 과업을 정면으로 시도한 사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미국·일본과의 대화를 권유했으며, 이어서 두 나라 지도자들을 상대로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도록 설득했다.
획기적 사건으로서의 6·15공동선언
그 결과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적대관계 해소를 지향하는 '공동코뮈니케'(2000. 10.)가 발표되었으며 일본과 북한 사이에도 '평양선언'(2002. 9.)이 발표되었다. 비록 미국 내 정세변화와 2차 북핵위기 발생으로 이러한 움직임들에 제동이 걸렸으나, 이때 6·15공동선언이 닦아놓은 길은 앞으로도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를 향한 험난한 여정에서 소중한 유도로(誘導路)가 될 것이다.
6·15를 계기로 본격화된 남북대화에서 확보한 대북 영향력은 한국정부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에 중요한 역할을 맡을 원천이 되었다. 예컨대 6·15공동선언을 계승한 참여정부는 북한과의 상시적 대화를 통해 북한을 설득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미·중과의 조율을 추동함으로써 6자회담에서 촉진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정부가 9·19공동성명(2005.9)을 도출하는 데 주도적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15공동선언은 그동안 강대국 정치에 밀려 당위적으로만 자신들이 문제해결의 주체였던 남북한이 한반도 분단해소 과정에 실질적인 주체로 나선 사건이었다. 가장 민감한 통일의 방법에 대해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한 공동선언 제2항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