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 (68)

68. 아름다움의 서사

등록 2011.06.14 13:43수정 2011.06.1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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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보카에서의 하루하루는 흘러만 갔다. 아르헨티나 이곳저곳을 둘러보겠단 일념으로 생각이 바뀌고 나니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시인과 Y는 매우 친절하게 우리를 돌봐 주었고, 가이드는 아침이면 방문을 노크해서 우릴 깨웠다.

외국어에 능통한 가이드는 다른 방의 게스트들과도 이야기를 잘 나누었다. 특히 미국인 동성애자 커플들과는 매우 유쾌하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꽤 보수적이고 권위점인데 비해 동성애에 관해서는 그나마 관대한 듯 했다. 우리가 게스트하우스 음악감상실에 내려가면 그 커플들과도 종종 마주쳤다. 그때마다 가이드가 통역을 해 주어서 꽤 재미있는 농담도 나누었다. 곡명 맞추기 게임 같은 것도 했다.


"아! 저건 내가 알아요. 리베르 탱고!"

때때로 아는 음악이 나오면 조제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선 우쭐거렸다. 드라마나 광고 음악으로 많이 나와서 그 정도는 안다고 어깨를 쭉 폈다. 이 곡의 작곡가 피아졸라의 삶도 가르델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르델 덕분에 피아졸라는 영화에 출연해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단역으로 잠깐 출연하기도 했다 한다. 피아졸라는 현대 클래식과 접목한 연주를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우린 게스트 하우스에 딸린 조그만 상영실에서 피아졸라와 첼리스트의 공연모습을 보았다. 이미 20 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연주는 백발과 어우러져 우수에 가득찬 눈빛과 매우 잘 어울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반도네온 소리가 초기 탱고 애호가들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싶어요. 지금의 나랑 똑같은 느낌이었을까도 궁금하고."

"그거야 뭐, 사람의 감정이란 게 자신의 환경과 연관돼서 움직이는 것이니까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알아보면 더 쉽게 이해가 갈수도 있죠."

하면서 Y는 탱고가 도입될 무렵의 모습은 사창가와도 무관하지 않다고도 했다. 고된 일을 마친 부두의 하급 노동자들은 하루의 고된 노동을 잊기 위해 사창가로 향한다. 당시엔 여자가 매우 귀하던 시절이라 그들은 여자를 사로잡기에 혈안이 돼 있다. 그들은 열심히 춤을 연마해서 탱고를 통해 그 실력을 뽐내며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거리의 여자들과 스탭을 밟으며 껴안기 위해 그들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거칠고 빠르지만 한편으론 드라마틱하고 우아한 동작을 익혔고, 이런 것들은 탱고 특유의 독특한 울림이 된다.


나는 서양의 모든 커플 댄스가 잘 차려입은 남녀가 추는 사교춤인데 비해 탱고는 현실의 모습이 반영된 점에서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인은 좋은 지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대다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이면적인 것에만 의미를 두고 마치 그 전체를 파악한 양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쓰는 것도 꼬집었다. 탱고는 추함, 번민, 그리고 아픔이 배어있기에 최종적으로 아름다움의 감정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서사라고 했다.

그러한 감정의 물결을 아주 섬세하게 읽는 또 하나의 관객이 있었으니 그건 2층 우리 방의  또 다른 투숙객, 고양이었다. 저녁이면 고양이는 창가에 앉아서 별과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따금 피아졸라의 음악을 들려달라고 했다. 여기 오기 전까진 매일 저녁마다 반도네온 소리를 듣는 게 일과였다는 것이다. 길고양이로 떠돌았지만 클럽 멘도사의 처마 밑에서 비와 바람을 피하며 들었던 반도네온 연주, 그리고 내밀하게 파고드는 그 소리에 감동하며 하루를 떠나보냈다며 녀석은 눈물이 그렁했다.


"고양이 따위가 까탈스럽긴!"

조제는 삐쭉거리며 1층으로 내려가선 탱고 음악을 방 안에서 들을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그리곤 몇 개의 시디와 시디 플레이어를 얻어와서는 저녁마다 창가의 독특한 관객에게 그 음악들을 하나씩 틀어주었다. 알토와 소프라노도 창틀 한쪽에 앉아서 나란히 하늘을 쳐다보며 저녁의 산들바람처럼 우아하게 어깨를 움직이는 모습이란 참으로 가관이었다.

어느날은 종일 쏘다니며 관광을 하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보니 뜻밖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흰갈매기는 페르도에게서 편지를 가져왔다며 내게 건내고는 돌아갔다. 나는 방으로 올라와서 그걸 뜯어보았다. '그 쪽 보카'에는 지금도 '뭔가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분노의 술을 궁금해 하고 그걸 마시며 평온을 찾고 싶어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열망사냥꾼이 또 한 사람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분노의 술이 효과를 본 탓에 얼마 만에 깨어났지만 이제 술독에서 점점 술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도 곁들였다. 지하 창고에 있던 병술은 얼마 전에 어느 부호가 모두 사가지고 가는 바람에 그 돈으론 창고 증축 사업에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꼬맹이는 별 탈 없이 잘 지낸다며 우리 소식을 궁금해 한다고 덧붙였다.

"어? 그럼 여기 있는 꼬맹이는 뭐야?"

조제는 화락 거리며 편지를 뺏어 읽기 시작했다.

<계속>
#탱고 #장르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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