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문화의집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이영희씨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아이들만 데려다줬다가 데려오는 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다닌다.
전주삼천도서관 전주역사박물관 우아문화의집
둘째 지윤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 근처 '문화의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책도 읽고 친구들도 만나고, 이런저런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큰딸 서윤이는 학교가 끝나면 일주일에 한 번씩 집과 정반대에 떨어져 있는 도서관으로 출근(?)을 한다. 버스를 한 시간 타야 되는 거리다. 그 도서관에서 서윤이는 '어린이 명예사서 교육'을 받는다. 교육은 한 달에 한 번 이뤄지지만 서윤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봉사활동도 놀랍지만 내가 깜짝 놀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가 혼자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를 간다는 것이었다. 오후 6시만 넘어도 딸 아이를 집 앞 슈퍼에도 절대로 혼자 보내지 못하고 '벌벌' 떠는 나같은 엄마도 정상은 아니지만, 영희씨도 평범한 편은 아니다.
기자 : "아직 어린아인데, 어떻게 혼자 버스를 태울 생각을 하셨어요?" 영희 : "저는 아이들 1학년 때부터 혼자 버스 타는 법을 가르쳤어요. 제가 차가 없다보니 일일이 데리고 다닐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저도 너무 얽매이구요. 주변에서는 저보고 미쳤다고 해요. 어떻게 여자아이를 혼자 버스에 태우냐고. 그런데 그런 걱정을 일일이 하다보면 끝이 없어요. 저는 제 아이가 그냥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제가 너무 안일한가요?(웃음)" 기자 : "어쨌든 강심장이십니다. 도서관 가서 아이는 뭘 하나요?" 영희 : "큰애가 동화구연을 배웠거든요. 어린 동생들에게 책도 읽어주고, 책 정리도 하고, 낡은 책 보수도 하고. 정 할 일 없으면 책도 읽고…. 피곤한 날은 낮잠만 자다오기도 한다그러더라구요. 특히 책 빌려줄 때 바코드 찍잖아요. 그게 그렇게 재밌대요." 서윤이는 책도 읽고, 봉사도 하고, 직업체험도 하는 일석삼조의 경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영희씨의 수첩엔 도서관, 미술관의 일년 계획표, 시민단체나 환경단체에서 주관하는 다양한 행사들의 기록이 빼곡하다. 수시로 해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일정을 확인하고 점검한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행사, 색다른 경험을 안겨줄 시간을 그녀는 찾는다. 이런 그녀에게 누가 '시간이 남아돌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들은 극성이라 쓰고, 나는 최선이라 읽는다 방학에는 방학대로 또 바쁘다. 일산에서 사는 친정 여동생 집으로 4박5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기 때문이다. 남편은 바쁜 까닭에 아이들을 데리고 기차를 이용한다. 여동생 가족과 합류해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누빈다.
이 기간은 평소 쉽게 갈 수 없는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전쟁기념관' 등 서울지역의 공공문화공간을 맛보고 오는 시간이다. 이왕이면 도슨트나 도우미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에 맞추어 스케줄도 계획하고, 동선도 짠다. 영희씨의 조카들은 영희씨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놀이공원에 가고 싶은데 이모가 오면 공부(?)해야하기 때문이란다.
기자 : "다양한 체험기회를 주려는 엄마의 노력들이 효과가 있다고 느끼세요?" 영희 : "효과요? 그런 것들이 하루이틀 한다고 눈에 보이는 효과를 주는 건 아니잖아요. 결과를 보는 엄마들이 있고, 과정을 보는 엄마들이 있어요. 전 후자 쪽이에요. 전시장에서도 애들이 그림을 뭐 얼마나 집중해서 보겠어요. 그 과정을 즐기는 거죠. 대충 보는 것 같았는데 어느날 우연히 티비나 광고에서 본 그림을 기억해낼 때는 참 기특하더라구요. 고생하고 다녀온 보람이 있다 생각했죠." 기자 : "콩나물 시루에 물주듯이 말이죠." 영희 : "그런데 그 순간, 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나는 내 만족을 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아닌가, 하는." 기자 : "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어요." 영희 : "얼마전 한 미술관에 갔는데 거기에 마리오네트 인형이 있었어요. 팔과 다리를 사람이 모두 조종하는 목각인형이었는데 그걸 보고 우리 둘째가 그러더라구요. 사람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게 꼭 우리같다고. 그 말을 듣고 솔직히 충격받았어요. 그 후로 무슨 계획을 짤때는 항상 아이들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게 됐어요." 기자 : "큰아이 명예사서 교육은 누구의 선택이었나요?" 영희 : "그건 아이가 흔쾌히 선택한 거였어요. 다행히도.(웃음)" 영희씨 뿐이랴. 나 역시 그럴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많은 걸 보여주고,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원하는 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여러 번 있다. 과연 엄마의 욕구와 아이의 욕구는 어느 지점에서 타협할 수 있을까? 혹시 타협이 불가능한 평행선은 아닐까?
기자 : "본인이 혹시 극성엄마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영희 : "전 제가 극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서, 해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방학 때면 서울로 전시회 다니고, 여기저기 다니는 그런 저를 보고 제 주위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기자 : "뭐라고 하는데요?" 영희 : "너, 그렇게 지방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서울로 대학 가긴 힘들다는 거예요." 처음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을 때, 영희씨가 받았던 신선한 충격담(?)을 들려줬다. 영희씨로서는 모처럼 큰 맘 먹고 결심한 문화체험 일정이었다. 막상 그곳에서 영희씨가 목격한 것은 너무나 부담없이 자유롭게 그런 시설을 누릴 수 있는 수도권 아이들의 환경이었다. 문화적 환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대수롭지 않을 수 있겠지만, 영희씨처럼 아이들에게 많은 문화적 자극을 주고 싶은 엄마 입장에서는 다양한 문화환경이 부럽기만 했다.
왜 근사하고 괜찮은 전시나 공연은 모두 수도권에만 집중되어 있을까? 전시나 공연은 둘째치더라도 최신 교육정보나 교육 기반시설 면에서도 수도권을 따라잡을 수 없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지방의 학부모들은 지방과 수도권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실감한다. 이제 아무도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기자 : "꼭 서울로 대학보내려고 그런 경험들을 시키는 건 아니잖아요." 영희 : "물론 그렇죠. 하지만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허탈해요. 현실은 현실이죠. 막상 서울에 가서 보면 수도권과 지방과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니까요. 정말 뛰어난 아이들이 아니면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 가기가 힘들겠어요." 대한민국 '지방' 학부모로 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