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노란 드레스 입은 나에게 반했단다

[홀로 떠난 6개월의 아프리카 탐험 29] 잔지바르에서 다시 다르에살렘으로

등록 2011.06.07 18:23수정 2011.06.0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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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가게 여심을 흔드는 옷가게. 스톤타운에 자리 잡은 이 곳도 예외는 아니다.
옷가게여심을 흔드는 옷가게. 스톤타운에 자리 잡은 이 곳도 예외는 아니다.박설화

잔지바르 스톤타운은 노예무역이 흥했던 역사와 시간의 면면한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그만큼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와 볼거리가 많아 쇼핑의 손길을 기다리는 물풀들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 중엔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자들의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옷가게!

스톤타운에서 눙귀 비치로 떠나기 전부터, 골목골목을 누비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힐끗거리며 치마가 걸치고 싶던 나였다. 허름한 카고바지와 새로울 것 없는 티셔츠에 물리기도 했을 뿐더러 비치웨어의 편리성과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갖춘 것이 바로 롱 드레스였기 때문이다.


잔지바르를 떠나던 날, 배 시간은 밤 11시 정도였으므로 스톤타운에 도착한 낮부터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가게 앞을 지나던 중, 밖에서만 보던 그 옷가게로 들어갔다. 쓸데없는 쇼핑을 하지 않기로 한 긴축재정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냐고 물었던 내 질문에 돌아온 30달러라는 가격은 꽤 비싸게 느껴졌다. 

"이거 입어봐도 되나요?"
"아, 그럼요. 저쪽에서 입으세요."

옷가게 독특한 탄자니아의 느낌 그대로를 살린 옷들을 진열해놓은 옷가게
옷가게독특한 탄자니아의 느낌 그대로를 살린 옷들을 진열해놓은 옷가게박설화

가게 안에 있던 사람은 말쑥하게 빼 입은 젊은 남자였다. '살까말까, 내가 미쳤지 지금 무슨 옷을 사겠다고 30달러씩이나. 아니야 이거 하나 사면 기분전환은 최고일 텐데… ' 등등의 혼잣말을 뇌까리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예뻤다. 노란색의 롱 드레스는 한국에서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내 가방에 넣었겠지만, 난 여행자였고 30달러면 길 위의 나에겐 꽤나 큰 지출이어서 단념하기로 했다. 더군다나 아프리카 대륙 위에서부터 내려오며 걸리는 기간이 점점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른스러운 처신이 필요했다.

그림 사세요. 야외 갤러리겸 그림을 파는 상점.눙귀비치.
그림 사세요.야외 갤러리겸 그림을 파는 상점.눙귀비치.박설화

옆에 있던 그 남자는 아까부터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때요? 옷은 예쁜데 제 스타일은 아니네요."

분위기가 머쓱해서 한마디 던지자 남자는 천천히 운을 뗐다.


"지금... 제 마음속에 어떤 일이 생겼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일몰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일몰을 보기 위해 적당한 포인트로 유명한 까페는 늘 오후시간이 붐빈다.
일몰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일몰을 보기 위해 적당한 포인트로 유명한 까페는 늘 오후시간이 붐빈다.박설화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남자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사랑, 참 편리하게도 오는군요. 그런 말 여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좀 더 시간을 갖은 다음에 얘기해야 먹힐 거예요."

웃으며 그에게 건넨 농담 겸 충고는 전달이 된 듯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우습게 들릴거라는 걸 나도 알아요. 그런데 나에게 일어났어요. 이미. 그걸 어떻게 제가 이해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스톤타운에서 만난 아기. 잔지바르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문화처럼 인종도 여느 아프리카와는 다른 느낌이다.
스톤타운에서 만난 아기.잔지바르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문화처럼 인종도 여느 아프리카와는 다른 느낌이다.박설화

"사랑한다"라는 말을 지금껏 들은 것보다, 최근 몇 개월간의 여정 동안 들은 횟수가 더 많은 것 같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표현 차이일 수도, 그냥 쿡 한번 찔러보는 것일 수도 있을 그 여러 번의 사랑들은 내가 조절하기에 그리 어려운 것들은 아니었다. 적당한 호의까지만 허용하고 선을 긋는 것은 서른이 훌쩍 넘은 내 나이에선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진심을 담고 있어서 인상적인 이 남자.

그 날 밤 배로 떠난다는 나의 말에 더 있다 가면 안되냐 한다. 안 된다는 내 대답에 그럼 나의 다음 행선지인 잠비아로 같이 여행하면 안 되겠냐는 부담스러운 제의를 했다. 결국 다르에살렘까지만 데려다 주겠다는 (밤에 승선하면 다르에살렘에는 새벽에 도착한다.) 제의까지 내가 모두 거절하고야 남자는 깨달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배 타는 곳으로 배웅 나오는 일뿐임을.

잔지바르를 잇는 페리들 저렴한 가격의 Flying horse페리가 다르에살렘행 가격을 공시해놓고 있다.
잔지바르를 잇는 페리들저렴한 가격의 Flying horse페리가 다르에살렘행 가격을 공시해놓고 있다.박설화

그리고 인사를 하고 배에 타던 내가 마지막으로 뒤돌아섰을 때 본 것은 놀랍게도 그 남자의 눈에서 나오고 있는 눈물이었다. 도저히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지만, 타인의 일로 흥미롭게 받아들였던 그 남자의 경험.

그 남자의 경험이 나에겐 선율의 스타카토 같은 생기로 다가온다.

'아, 카고바지에 허름한 티셔츠로도 아직 난 죽지 않았구나...' 정도의 생기.

타자라(TAZARA) 기차역 동아프리카 철로의 허브 타자라 기차역.
타자라(TAZARA) 기차역동아프리카 철로의 허브 타자라 기차역.박설화

정확히 12월 11일. 이른 오전의 다르에살렘에 도착하면서 배 안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혼자서 조용히 마음속으로 했던 기도였다.

'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좀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잠비아로 가기 위한 타자라(tazara)기차표 예매를 못했는데 지금 바로 가서 꼭 한 자리만 살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것이 저에겐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겁니다.'

당일 구매는 어렵다고 알고 있었고 잔지바르로 들어가기 전 예매를 해놓고 싶었으나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그냥 나와 버린 나였다.

열대과일 이방인에게 기꺼이 권하는 잔지바르의 열대과일.
열대과일이방인에게 기꺼이 권하는 잔지바르의 열대과일.박설화

그 날 못가면, 힘든 여정이라 익히 들어온 버스를 타거나 혹은 굳이 기차를 타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어떤 이유보다도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기차 종단은 꼭 해보고 싶었으므로 표에 대한 나의 마음은 꽤나 간절했다.

일찌감치 도착한 나보다 더 일찍 나와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 그 줄 중에 물어물어 나도 줄을 섰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창구의 문이 드디어 열린다. 드디어 내 차례. 깐깐하게 생긴 오피스 레이디가 안경 너머로 힐끗 보며 아침인사를 한다.

"아,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제가 혼자인데요. 혹시 잠비아 가는 티켓 살 수 있을까요?"(최대한 반갑게 웃으며. 웃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가는데요? 오늘이라구요? 당일은 어려운데... 흠... 잠깐 있어봐요."

옷감 팔아요 탄자니아 전통 복식인 캉가와 키탱게(보자기에 프린트 된 문양에 따라 캉가와 키탱게로 나눈다)를 파는 곳.
옷감 팔아요탄자니아 전통 복식인 캉가와 키탱게(보자기에 프린트 된 문양에 따라 캉가와 키탱게로 나눈다)를 파는 곳.박설화

오늘 타고 싶다는 대답을 기대하지 못한 듯한 그녀의 대답에 ' 역시나 안 되는 것인가 ' 하는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기다려 보라고 한 것이 어딘가. 잠시 장부를 휙휙 넘기던 그녀는 안경 너머로 날 보며 묻는다.

"몇 명이죠?"
"저 혼자예요!"

혼자가 좋을 때는 이런 때! 혼자이므로 이미 세 명이 들어찬 4칸짜리 일등석의 칸에 내 짐을 놓을 수 있게 되었고, 기꺼이 그 해의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난 받은 셈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2009년 8월부터 2010년 1월까지의 총 6개월의 여정을 바탕으로 기고합니다. 외래어의 경우, 소리나는 대로 발음 표기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지난 2009년 8월부터 2010년 1월까지의 총 6개월의 여정을 바탕으로 기고합니다. 외래어의 경우, 소리나는 대로 발음 표기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옷가게 #스톤타운의 드레스 #탄자니아에서 만난 사람 #아프리카 종단 여행 #아프리카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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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담은 사진에세이 [same same but Different]의 저자 박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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