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부르다 대성통곡한 친구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친구야, 넌 언제쯤 행복해질까?

등록 2011.06.01 14:25수정 2011.06.0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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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아이 중학교 1학년 때 학부형 총회가 끝나고, 처음 만난 여자 셋이서 가볍게 맥주 한 잔씩을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나 그날 술 마셨던 누구 엄만데 좀 볼 수 없겠어?"

사실 그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본 그녀는 나와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다시 만나자는 전화에 어리둥절한 채로 불려 나가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그런데 두 번째 본 날도 역시 나랑은 좀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그 쪽에서 자꾸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어, 아닌데 아닌데.'

그러면서 자꾸 만나는 횟수가 늘어갔다. 마음속으론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만나는 날이 늘어가고 있던 어느 날, 빈 속에 마신 술이 잘못되어 난생처음 구토를 하게 됐다. 꽤나 정갈한 레스토랑을 겸한 술집이었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다가 느닷없이 와르르 속에 것들을 다 토해 버렸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녀가 싫은 내색도 안하고 차분하게 그 혐오스러운 오물들을 다 닦아내더니 내 등까지 두드려 주고 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순간에 확 술이 깼는데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얼른 그녀와 헤어졌다. 다시는 얼굴을 안 보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그녀에게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버린 날부터 어쩐 일인지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자꾸 편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갔다. 다른 친구를 찾거나 만들어 볼 필요도 없이 그저 누군가를 만나 술 한 잔 하고 싶을 때면 어느 쪽이든 먼저 전화를 했고, 거절하지 않고 나와 주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야,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니?"


아카시아 꽃이 피었다 지고 여름을 알리는 금계국이 노랗게 피기 시작하던 어느 해 오월,그녀와 술을 마시고 밤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보름 무렵이었던지 하늘엔 노란달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야, 우리 여기서 저 달이랑 한숨 자고 가자."

술김에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그녀를 길바닥에 주저앉혔다. 등에 선뜻한 한기가 느껴지는 붉은 보도블록 위에 덜렁 드러누워서 우리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있었다.

"난 생전 처음으로 너에게 친구라는 말을 했어.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 학교를 다녔는데도 내겐 친구가 안 생기더라. 난 너를 내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왜 내게 친구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하냐?" 

안방에라도 누운 듯 팔베개까지 하고 누운 그녀가 항의하듯 내게 물었다.

"미친년,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냐?"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녀는 자신의 창자 밑까지 다 드러내 보이며 나를 만났지만, 나는 그녀처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길은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난 그저 그날이 그날 같고 하루쯤 빼 버려도 그다지 표가 나지 않는 밋밋한 날들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녀가 살아내는 하루하루는 치열한 전쟁터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어쩌다 하찮은 푸념이라도 하면 그녀는 대뜸 "너 엄살떨지 마" 같은 간단한 한마디로 뚝 잘라 버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그녀의 얘기를 늘 들어주는 편이었고, 그녀는 깊은 우물 속에 고여 있는 물이라도 퍼내듯 한없이 무슨 말인가를 내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딱 한마디로 표현했다. 늑대를 피하려다 범을 만났다고. 늑대란 좀 유난스러웠던 그녀의 친정엄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삶은 나날이 기울어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잘 나가던 남편의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던 무렵부터 힘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그녀가 느닷없이 이사를 가 버리더니 연락을 뚝, 끊어 버렸다. 전화번호가 있긴 했었지만 저나 내나 연애하는 연인들처럼 서로 자존심을 세우며 연락을 안 하고 지내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욕을 하면서도 웃음이 터지는 그녀

그렇지만 술생각이 나거나 누군가 만나 속내를 꺼내 보이고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그녀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서먹한 채로 지내던 며칠 전, 차 한 잔을 만들어 14층 베란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자동차 열쇠를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유난히도 운전하는 걸 즐겨 했던 그녀와 많은 길을 달리곤 했었다.

시립박물관 앞에 차를 세워두고 오래도록 휴대폰을 들여다 봤다. 그러다가 그냥 혼자서 호남고속도로로 차를 돌렸다. 그녀와 내가 좋아했던 길이나 달려 보자는 심산이었는데, 통행료 패스를 빼들자마자 후회가 됐다. 전화해서 같이 움직일걸 그랬나 싶었다. 한 시간쯤을 혼자서 달리다가 기어이 그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바쁘지 않으면 6시쯤 한잔하자.'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대꾸가 없던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냐, 나쁜 년아. 내가 바쁘다고? 나 안 바빠. 하나도 안 바쁘다는 거 너 모르냐?"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다. 욕을 하면서도 웃음이 절로 터졌다. 술안주로 핫치킨을 시켜 놓고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앉은 그녀의 얼굴은 많이 지쳐보였다. "어쩌다 얼굴이 그 모양 그 꼴인거냐"고 퉁박을 주면서도 반가운 마음에 가슴속이 울컥해졌다.

"사는 형편이 어려워지다 보니 아이들이 다 집을 떠나 버렸어, 내가 아들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알지?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치킨집 전화번호를 보고도 우리 아들이 좋아하던 건데, 그러면서 눈물이 나고, 피자집 광고지가 눈에 보여도 우리 아들 잘 먹던 건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큰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진다.

"임병, 난 아이들 내 놔 불먼 날아가겄구만 써글년."

일부러 큰소리로 싹둑 문질러 버렸다.

"그런데 남편이랑 싸울 때는 예전엔 아이들이 있어서 소리도 못 지르고 참았는데 지금은 맘 놓고 싸울 수 있어서 그거 하나는 좋더라. 히히"

울다가 웃다가 변덕도 그런 변덕이 없다.

"나, 얼마나 힘든지 너 모르지? 나 정말 말할 수 없이 힘들어."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못 본 채 우물거리다가 그냥 맥없이 휴대폰에 찍혀 있는 시간을 본다. 그동안 밀린 얘기를 하다 밤이 깊은 거리로 나섰는데 노래방 좀 데려다 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머. 그러든지'하면서 노래방엘 들어갔는데 이 친구 <백만송이 장미>를 부르다 말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더니 엉엉 울기를 시작한다.

"너 머여, 하라는 노래는 안 허고." 

구시렁거리는데 이 친구 울음이 끝이 없다. 그저 넋 놓고 앉아 울고 있는 친구의 어깨를 뒤에서 껴안은 채 나도 따라서 울고 있는데 한참을 통곡하듯 울던 이 친구, 깊은 숨을 한번 쉬고 나선 "이제 좀 시원하다"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만만하지 않은 삶을 사는 친구야, 미안하다

살아가는 일이라는 게 왜 이렇게 만만하지가 않은 걸까? 제법 하던 사업이 잘 되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부터 사는 형편이 사정없이 무너져버린 이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어깨나 한번 안아주는 거 말고는 뭐라고 거들어 줄 말조차 생각이 안 난다.

장미가 무성하게 핀 울타리를 끼고 한참을 걷는데 "오늘 나 불러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열 번도 더 한다. 저 혼자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런 말을 자꾸 하나 싶어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보는데 커다란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나 정말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었나 보다. 그냥 좀 많이 어렵고 힘든가보다 그렇게나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답답해하며 지내는 줄 모르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친구를 일컬어 '내 슬픔을 등에 지고가는 자'라고 한다는데 나는 그녀의 친구이기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보내고 좀 걸어 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친구 한사코 택시를 불러 세우더니 지갑을 뒤져 택시비를 던져준다. 울어서 눈이 벌개진 채로 가로등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두고 돌아와 자리에 누웠는데 가슴속에 바위 하나를 떠안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뒤척거리는데 그냥 뜻 없이 눈물이 난다.
#친구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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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부이자 직장인 입니다. 주변의 이야기나 일하면서 느끼는 일들을 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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