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사 충효당
정만진
이윤재 선생 묘소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언덕을 넘으면 하빈면 소재지에 닿는다. 면 소재지 중심가에서 왼쪽으로 달려 육신사를 찾는 것이 오늘 답사 여정의 꽃이다.
하빈면 소재지에서 육신사를 찾아가는 일은 쉽다. 낯선 농촌 지역에서 생소한 답사지를 간단히 찾아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여기서만은 단연 예외이다. 무작정 직진을 하다보면 '육신사' 현판을 단 커다란 불이문이 도로 위의 하늘을 가로막고 서 있기 때문이다. 불이문은, 이 마을 사람들이 육신사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단숨에 알게 해주는 표지물이다.
육신사가 있는 묘골 마을 들머리에는 사육신기념관이 있다. 사육신기념관은 2010년에 개관을 했다. 단체 방문객 교육장으로도 쓰이는 그 건물의 앞이 바로 주차장이다. 교육장으로서는 위치를 잘 잡은 셈이다.
사육신기념관 앞에서 고개를 들면 단연 눈길을 끄는 멋진 옛날 기와집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눈에 꽉 차게 들어온다. 담대한 소나무들이 좌우로 장승처럼 자라 있고, 들판 같은 마당은 고운 잔디로 말끔하게 빛나고 있다. 박팽년의 7대손 박숭고가 1644년(인조 22)에 지은 충효당이다.
육신사의 현판은 박정희의 사령관체 글씨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1778년 건물인 도곡재와 부속건물인 숭절당 등등 품격을 뽐내는 와가들이 좌우로 줄을 짓고 서 있다. 그 와가들을 사열하다 보면 이윽고 육신사(六臣祀) 현판이 달린 외삼문에 닿는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사당인 숭정사, 그리고 오른쪽에 보물 제 554호인 태고정이 나타난다.
외삼문 앞에 서서 '六臣祀' 세 글자가 이른바 '사령관체'라 불리는 박정희의 글씨라는 사실을 되새겨 보는 일은 '역사의 역설'이다. 쿠데타를 뒤집으려다 죽은 이들이 사육신이다. 박정희는 그 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고 장기간에 걸쳐 독재를 했다. 그가 왜 자신과 반대되는 길을 걸은 사육신들을 기려 육신사의 현판 글씨를 썼는지, 정말 헤아리기 어려운 난제다.
생각해 볼 것이 하나 더 있다.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의 현판에는 응당 '육신사'나 '六臣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崇正祀'가 새겨져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행과 함께, 특히 가족답사라면 자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에 잠겨보시라. 역사문화 여행객다운 교육적 활동의 실천이다. 물론 답은, 이 사당이 사육신만 모시지 않고, 사육신과 행동을 같이하다 동시에 처형당한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도 같이 제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