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의 공포를 다룬 영화 영화 <앵그리맨>
앵그리맨
선혜에게 외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존재다. 일곱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다. 외할머니가 단순히 유년시절을 돌봐줬기 때문만은 아니다. 외가를 떠나온 이후 그의 삶이 악몽 같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선혜는 도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었다. 학교생활도 낯설기만 했다. 선혜 아빠는 그런 선혜를 더 엄하게 대했다. 선혜는 "아빠가 남자애처럼 키웠다"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1, 2학년밖에 안 된 아이에게 몇 시간씩 엎드려뻗쳐를 시켰던 아빠다. 빗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던 적도 수없이 많다. '일기를 안 썼다'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무차별한 매질의 명분이었다. 그 매질이 선혜에게로만 향했던 건 아니다. 엄마는 물론 선혜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여동생도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선혜는 "아빠하고 살았을 때, 아빠하고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얘기했어요"라고 말했다가 정정한다. "아니, 아예 얘기하는 거 자체를 못 했어요. 왜냐, 아빠의 기에 짓눌려 버리는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땐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다고만 했던 선혜는 두 번째에야 부모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선혜 엄마에게 아빠는 첫남자였다. 아는 언니의 소개로 만났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글 읽는 것도 서툰 엄마다. 선혜는 "엄마가 이 남자 아니면 누굴 또 만날까 싶어서 결혼한 것 같다"고 짐작했다. 선혜 표현대로라면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닌" 스물 셋에 선혜 엄마는 결혼했다.
선혜와 여동생이 유년을 외가에서 보낼 정도로 그의 엄마, 아빠는 바빴다. 작은 봉제공장을 운영했다.
"아빠가 공장했다고 하면 다들 집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죠. 아빠는 술, 담배, 경마 이런 쪽에 돈을 무슨 후원하듯이 썼어요. 아빠 지갑은 한 달에 딱 하루, 돈 들어오는 날만 차 있죠. 다른 날은 텅텅 비어있고…. 그래서 집도 그 집에 몇 년째 살고 있고요."선혜네는 단칸방에 산다. 화장실도 집 바깥에 있다. 그래서 선혜는 밤에 '절대' 화장실에 안 간다. 처음 만났을 때 선혜는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내 방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소원을 말했다.
아빠가 봉제공장 사장인 건 얻을 것은 없고 피해만 주는 일이었다. 아빠는 선혜 자매에게 만날 라벨을 자르라고 했다. 옷에 넣는 심지와 천을 심지 하나, 천 하나 식으로 겹쳐놓고 다리미로 지지는 일도 했다. 몇 천 장씩 하다 보면 손은 감각을 잃어갔다. "직원들은 다른 더 중요한 일 해야 하니 너희가 이걸 도와라. 돈 줄게" 했던 아빠는 그렇게 일한 선혜 자매의 손에 몇 천 원을 쥐어줬다.
일만으로도 힘들었던 자매에게 아빠의 폭력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지금은 잠을 자는 밤이 좋은데 그때는 집에 네 식구가 있는 게 제일 싫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빠가 폭력을 휘두르다 보면 어떤 걸 던질지 몰라요. 공장을 하다 보니 쇳덩이가 많잖아요. 그걸로 머리 엄청 맞았어요. 엎드려뻗쳐 몇 시간씩 시키면 이마에서 땀이 눈물 떨어지듯이 뚝뚝 떨어져요. 그렇게 진을 다 빼놓은 상태에서 또 때리니까…. 이건 완전히…. 그때 신고를 했어야 하는데…."손목 그은 것보다 엄마, 아빠가 그 마음 몰라줘서 더 아파열다섯도 안 되는 어린 소녀에게 아빠는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벽이었다. 경찰 신고 등은 꿈도 못 꿨다. 학교 갔다가 중간에 '땡땡이' 치고 나오기 등의 소심한 반항을 했다. 엄마한테 주걱으로 맞은 날엔 가출도 감행했다. 그런데 중1때라 "개념이 없어서" 동네를 돌아다니다 엄마 눈에 띄어 다시 잡혀갔다. 그 뒤로도 몇 번 집을 나가기도 했지만 마음이 약해 엄마의 돌아오라는 연락에 돌아왔다.
마음은 약한 선혜였지만 자기 몸을 학대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자살시도를 여러 번 했다. 수면제는 구할 수 없고, 뛰어내리는 건 고소공포증이 있어 못 했다. 무조건 아픔이 있는 걸로만 했다. 손목을 긋는 것과 같은….
아픔에 무뎌진 몸이었다. 선혜가 말한다.
"어렸을 때 과자를 먹고 싶은데 가위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칼을 갖고 와서 손 위에 과자 봉지를 두고 막 칼질을 해댄 거죠. 그런데 봉지가 안 뜯어져요. 또 어디서 피가 뚝뚝 떨어져요. 보니까 손가락이 아예 뼈가 보일 정도로 돼 있는 거예요. 근데 전 그 정도의 아픔도 몰랐던 거잖아요. 자살하려고 했을 때도 그렇게 큰 아픔이었을 텐데 그땐 몰랐어요."몸보다 마음의 아픔이 더 컸다. 자살시도 실패 후 병원에서 3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가뜩이나 밤을 무서워하는 선혜를 혼자 남겨두고 그의 엄마, 아빠는 집으로 갔다. 지금도 선혜는 엄마, 아빠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울면서 "왜 그랬냐?"고 묻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못 들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아빠와 엄마를 내쳤다. 엄마한테 적극적으로 이혼하라고 하지 않았던 이유도 집에서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저 혼자 살기 바빴죠. 집에선 '니네들 싸워라, 난 알 바 아니다' 생각했어요. 친구랑 집을 탈출할 궁리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