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고택밝은 햇살이 고택 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엄혹한 식민지 시대를 산 상화는 이런 따스함을 느껴보지 못했으리라.
정만진
달성공원에서부터 상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우리나라 옛성의 축조 방식을 잘 말해주는 역사유적인 탓에 국가사적 제 62호로 지정되어 있는 달성공원에 가면, 호랑이도 있고 코끼리도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시비인 '상화시비'가 있다. 1948년의 일이다.
상화는 이미 18세인 1919년 대구의 3.1운동 모의에 가담했다가 발각나 서울로 달아난 끝에 도피 생활을 한다. 22세인 1923년에는 일본 유학 중 광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인들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귀국, 김기진 등과 함께 무산계급 문예운동체 '파스클라' 결성, 카프 발기인 참여(1925년),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는 등 (1926년) 민족적 항일문예 운동에 뛰어든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발표 때문에 시대정신의 상징이었던 동인지 <개벽>은 판매 금지 처분을 받는다. 상화는 1928년 독립자금 마련과 관련하여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고, 1936년에는 독립군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만주로 건너가기도 한다. 하지만 귀국하는 길로 바로 체포되어 일제로부터 큰 고초를 겪는다.
1939년에는 2년간 교사로 근무했던 교남학교를 그만둔다.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은 주먹이라도 세어야 한다면서 학생들에게 권투를 가르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독립군 장군인 형을 만나러 만주에 다녀오는 등의 반일 행동을 일삼는 민족시인 이상화를 일제가 가만 방치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일제는 불량선인이 학교 교가의 가사를 작성한 것은 문제라며 상화의 가택을 수색하고, 그의 시 원고와 고월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한다. 1943년 4월 25일, 상화는 <국문학사>를 저술하려던 뜻도 이루지 못한 채 고생 끝에 얻은 병 때문에 현재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에 보존되어 있는 '상화고택'에서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