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김동길 선생님. 1988년 10월 함 선생님 댁에서 내가 찍은 사진.
김성수
'인생은 선생을 만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도 결국 제자들은 스승이 평생 이룩한 업적과 그 열매를 먹고 산다는 말일 것이다.
나에겐 스승이 두 분 있다. 한 분은 함석헌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김동길 선생님이다. 인간은 사상적 존재이지만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조직을 벗어나서 살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함석헌 선생님을 통해서 나는 '조직을 넘어서' 일하는 법을 배웠고, 김동길 선생님을 통해서 나는 '조직과 더불어' 일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십대는 그저 '조용한 아이'였다. 과외나 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수업만 열심히 들었지만 공부는 그저 그랬다. 1979년 나는 신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한국철도대에 입학했다. 철도대는 국립으로 당시 거의 무료였다. 그래서 나는 학비가 거의 없고 취업이 보장된 철도대에 입학하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도대 생활을 열심히 했고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내 생활의 반경은 집, 학교, 교회로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고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 하의 사회문제에도 전혀 무관심했다.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해준 선생님철도대를 한참 다니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가 죽은 직후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우연히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어수선한 시국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둔감한 청년에 불과했다.
이런 철없던 청년에게 선생님의 해학과 기지를 섞어서 하는 강의는 큰 감동을 주었다. 선생님은 당시 박정희가 "자기 머리보다 훨씬 큰 감투를 쓰고 있으니 그 감투에 눈과 귀가 가려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결국 '탕탕탕!' 소리와 함께 목숨을 잃은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셨다. 무서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하는 선생님의 강의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함석헌'이란 친숙하지 않은 이름 석 자를 처음 접한 것도 이날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을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멀지 않아,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공개강연을 직접들을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고, 그의 조용한 열변에 나는 마치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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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함석헌, 김동길 선생님 두 분은 내게 이상적인 종교인, 사회인, 그리고 역사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80년대 초반의 어수선한 시국을 놓고 두 분은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다. 두 분의 말과 글을 접하며 비로소 늦게나마 나의 자아의식이 눈뜨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친구를 만나도, 길을 걸어도 매 순간 어디서나 그분들을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취미였고 나의 에너지였고 나의 궁극적 관심이었고 나의 전부였다. 그분들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강연을 미친 듯이 쫓아다녔고 내방을 아예 그분들의 사진으로 도배했다. 당시의 나를 '미친놈'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