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등록 2011.05.12 18:12수정 2011.05.12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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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독재 시절, 우리 사회 맨 밑바닥에서 온 몸으로 노동 운동을 실천한 여성 활동가들의 회고록 <가시철망 위의 넝쿨 장미>를 읽으면, 개인의 이성과 열정을 키우고 사회와 시대를 바꾸는 힘을 기르는 데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든다.


소위 가방끈이 짧은 그녀들은, 투쟁이 필요했기에 노동법을 스스로 배우고, 투쟁하는 방법을 익히며, 심지어는 야학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면서, 학생 출신 활동가들에게 전혀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여성 노동자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직업병은 못 속인다고, 똥물을 뒤집어 쓰고, 일본 원정까지 가서 투쟁을 하고, 형사들에게 쫓기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 바보스러운 행보는 학벌이 없어서, 즉 학교 경험이 적으니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허튼 생각을 했었다.

화려한 학벌과 학력을 가진 이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추진할 수도 없었던 일들을, 학교 문턱을 적게 밟은 그녀들은 현장에 버티고 서서 묵묵하게 사명을 완수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들은 지역의 거친 현장에서 여전히 열정을 뿜어내며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1970년대 일리히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산업 사회 이후 등장한 학교 자체를 없애야한다는 주장을 해, 전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인간은 본래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존재인데, 산업 사회 이후 학교라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학교가 있어야만 배울 수 있고, 교사가 있어야만 학습이 되는 것으로 오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일을 통하여 배우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배웠는데, 산업 사회는 '아동기'를 새롭게 규정하고 아동기에 학교라는 사회화의 의무과정을 반드시 거치도록 제도화했다는 문제 제기. <학교 없는 사회>를 번역한 박홍규 교수는, 학교를 통해 철저하게 배움이 타율화 되면서, 학벌은 위신과 권력의 도구가 되었고, 학교는 졸업장-학위-능력이라는 계급화를 조장하는 동시에, 교사 없는 배움, 학교 없는 학습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일리히의 통찰을 소개했다.

쓸데없는 학력에 대한 열등감, 학벌에 대한 과도한 동경은 결국 학교화의 산물이고, 우리도 모르게 학교를 다니면 배움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학습이 어느 궤도에 진입했다고 믿게 된다는 것. 그러므로, 교육이 계급화를 정당화하고 학벌에 의한 부와 권력의 편중을 지지하는 한 학교 없는 사회만이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의 초석이 되리란 견해. 학교를 없애는 대신 일리히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배우고, 동료나 연장자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망을 넓히는 게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일리히가 파견돼 운영하게 된 대학에서, 그는 단지 글자를 읽을 줄만 아는 사람들과 8년 사이에 학문적 문헌을 320편이나 냈고, 그들은 19세기 남미 문헌의 대부분을 색인 화했다고 한다. 처음에 글자를 읽을 줄만 알았던 이들이 프로젝트가 시작돼 다른 언어를 알 필요가 생기자, 영어, 독어, 불어 등 1년에 2-3가지 언어를 거뜬히 익혔고, 일리히는 충분히 적은 비용으로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학교화를 위해 불필요한 재정을 쏟아 붓고 있다고 일침하기도 했다.

며칠 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강효(가명)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입사 준비 중인 곳이 보건 의료 계열인데,  얼마 전 1차 서류를 통과하고 2차 면접 준비 중이라며, 미리 출제된 면접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에서 언론 관련 학과를 전공했지만, 취업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찾아야하는 현실. 강효나 나나 이야기를 하다보니,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 전체에서 글만 읽고 쓸 줄 알고, 간단한 셈만 할 줄 알면, 입사 시 학교 졸업장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학교 졸업'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 금지를 헌법에만 가두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의 영역에서 직접 실천한다면 말이다. 학교에서 교사나 교수가 아니라 현장에서 그 분야 연장자나 선배에게 직접 배우도록 장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스승의 날을 앞두고 학교의 권위를 되살려야 하고, 공교육을 새롭게 혁신해야 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문제가 교육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라는 교육 제도 자체에 있지는 않은지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학교 없는 사회 #가시 철망 위의 넝쿨 장미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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