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서 바라본 '리갈'(왼쪽), 가게 내부 모습(오른쪽).
최원석
길가에 구두 가게 두 곳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곳은 꽤 큰 진열장을 갖췄고, 다른 한 곳은 두 건물 틈새에 옹색하게 끼여 있었다. 나는 오른편의 작은 가게에 먼저 들어갔다. 붉은색 테이프 토막을 삐뚤빼뚤 붙여 만든 '리갈'이란 가게 이름이 여닫이문에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김정렬(67)씨가 작은 의자에 앉아 굵고 긴 눈매로 바라보았다. 낡은 구두를 새 것처럼 고쳐준 장인이다. 어른이 양팔을 벌린 정도 너비의 가게 안에는 재봉틀 두 대와 망치, 못, 접착제, 안료통, 붓, 페인트, 실패 등 얼핏 봐도 수십 개는 돼 보이는 공구들이 널려있었다.
"신발 산업이라는 게 중소기업 3000개를 돌려주는 산업이여."
구두 만드는 얘길 듣고 싶다고 했더니 김씨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와 원재료, 부품 등을 생산하는 기업을 다 합치면 그 정도 되니, 괜히 복잡한 얘기 꺼내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간청하자 김씨는 옛날 얘기를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열아홉 살에 구두 수선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 만리동에서 1년 정도 일을 하다 서대문으로 옮겨 양화점을 열었다. 친형과 함께 사람을 두고 남녀 구두를 만들어 팔았다. 모든 게 수작업이니 하루에 한 켤레 정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구두 한 켤레 값은 쌀 한가마니를 살 수 있을 만큼 비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예닐곱 해 동안 용문동과 후암동 등 서너 군데를 옮겨 다니다가 용문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구두를 만진 세월만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대기업의 브랜드 구두에 밀리고, 중국산 저가품에 밀려 김씨의 수제화는 설자리를 잃어 갔다.
"딸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손에 낀 때가 안 지워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