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짝패>의 천둥(천정명 분).
MBC
"암행어사 출도요!" 한국인들에게 이만큼 짜릿하고 시원스러운 표현도 드물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남루한 차림으로 암행하던 이몽룡이 병졸들을 데리고 나타나 악질 변 사또의 생일상을 뒤엎고 옥에 갇힌 애인을 구하는 <춘향전>의 명장면은, 보고 또 봐도 지루하지 않다.
지난 3일 방영된 MBC 드라마 <짝패> 제26회에서도 암행어사가 등장했다. 아니, 여기에 나온 어사는 진짜가 아닌 가짜어사였다. 의적단체인 아래적(我來賊)은 암행어사를 가장해서 전북 고창 관아를 습격하고자 대장인 천둥(천정명 분)을 포함해서 조직원들을 현지에 잠입시켰다.
천둥은 현지인들이 자신을 '신분을 숨긴 암행어사'로 착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불우한 선비 행세를 한 뒤, 어스름한 저녁에 전격적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재물을 몽땅 털어 지역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어사들뿐만 아니라 실제의 어사들도 반드시 준수하고자 했던 암행(暗行). 암행어사의 생명은 '암행'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제대로 지켜졌을까?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데 성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어사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그것을 수행했다. '암행어사가 뜰 것이다'는 첩보를 입수한 지방관들이 사전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암행어사가 임명장을 받고 현지로 떠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들이 신분을 숨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년) 때 처음 파견된 암행어사는 주로 종3품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임명되었다. 종3품은 요즘으로 말하면 중앙행정기관 국장과 과장의 중간 정도였다. 학자 스타일의 관료들이 많이 포진한 사헌부(검찰청), 사간원(감사원), 홍문관(문서관리 및 자문담당 부서)에서 암행어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암행어사 파견은 은밀히 이루어져야 했지만, 100% 비밀유지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경우 총리급 즉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추천에 따라 주상이 임명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부터 일정 정도는 비밀이 샐 수밖에 없었다. 주상(왕의 공식 명칭)이 추천 없이 단독으로 임명하는 경우에도 비서실(승정원) 직원들이 파견 업무를 주관했기 때문에, 정보가 누설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암행어사가 된 관료는 마패 외에 봉서(임명장)니 사목(지시사항)이니 유척(놋쇠로 만든 자)이니 하는 것들을 휴대했다. 유척(遊尺)을 왜 갖고 다녔냐 하면, 그것을 갖고 다니면서 도량형 등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봉서나 사목은 지방 관청에 가서 자신의 출도(出道) 즉 '직무집행 개시'를 선언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왕궁에서 주상을 알현하고 나온 암행어사는 집에 들르지 않고 그 길로 한성을 나서야 했다. 그는 한성을 벗어나기 전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받은 봉서(封書)의 겉면에는 "숭례문(남대문) 밖에 가서 개봉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왕궁을 나오자마자 궁금해서 몰래 뜯어봤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어사들이 명령을 준수했을 것이라고 신뢰해도 될 만한 이유가 있다. 임금을 아버지나 스승처럼 떠받들던 선비들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선비들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 포진해 있었고 주로 그들이 암행어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숭례문 밖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신원과 미션을 알아낸 누군가가 말을 타고 지방을 향해 미리 출발했다면 어떨까? 이런 경우에는 가장 빨리 미션을 알아야 할 암행어사가 가장 늦게 미션을 알아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을까? 아주 많았다. 뒤에서 설명된다.
암행어사의 '암행', 절대 불가능한 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