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에 태극기를 그려 넣은 한국계 어린이.
고은아
미국에 살면서 새롭게 접하게 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땐 그 존재 자체를 느낄 수 없었던 이들은, 한국과 한국어를 소개하고 가르치는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다.
자랑스러운 내 조국 대한민국과 한국 사회가 '직무 유기'라는 죄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이들은 한민족의 핏줄을 타고났으나 한국 땅에서 자라지 못하고 해외로 보내진 입양아들이다.
처음 학생비자로 미국에 건너온 나는 랭귀지 스쿨 한 학기를 마치고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1년간 휴학을 했다. 그러고는 첫아이가 7개월쯤 되던 2001년 봄, 다시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집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를 찾았다. 거기서 처음 만난 사람은 입학 담당 디렉터였던 마이클 블록씨. 사람 좋게 생긴 블록씨의 책상 위에는 동양아이 둘의 사진이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이들이라고 했다. 딸 사라는 서울에서, 아들 조나단은 부산에서 입양했다며. 나로서는 처음으로 알게 된 한국계 입양가족이었다.
그 후 두 번째 학기던가 내가 컴퓨터 관련 과목을 수강할 때였는데, 동양 여학생이 나 말고 하나 더 있었다. 아시안 인구가 1%도 안 되는 매사추세츠 주 시골 동네 칼리지에서 비슷한 외모의 학생을 만나자 무척 반가웠다. 한국에서 왔다고 말한 뒤,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자기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고무된 내가 "언제 한국에서 왔느냐"로 시작해 말을 걸기 시작하자 그녀가 제지하듯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그래서 한국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내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그때 그녀 나이가 갓 스무 살 언저리였는데, 그 마음속에 '태어난 곳'으로만 남은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그녀에게는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도 아픔이 되는 것이었을까?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정체성 찾기가 쉽다 4월의 마지막 날이던 30일 토요일 애틀랜타 근교 마리에타 시에 있는 베다니교회에서는 한국계 입양아를 키우는 미국인 가정들을 초청해 저녁만찬을 겸한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입양아와 그 가족을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문득 수년 전 잠시 스쳐 지나갔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라는 동안 이런 자리에 한 번이라도 가봤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한림대 허남순 교수와 뉴욕주립대(University at Albany, SUNY) 윌리엄 레이드 교수가 2000년에 한국계 입양아를 키우고 있는 가정 4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문화 체험 행사를 경험한 아이들의 경우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와 함께 자신들의 입양에 대해 대화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현저하게 적었다고 한다. 양부모가 출생국의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권장하고 아이들과 함께 이러한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입양아의 민족적 정체성을 고취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게 요지였다.
한국 아이들의 미국 입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고아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부터니까 어느새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초기의 양부모들은 '끝없는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듯하다. 미국에는 자녀를 외국에서 입양한 부모들이 주축이 돼 만든 입양아 지원 단체들과 여름 캠프들이 많이 있는데, 대개 설립된 지 10여 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1990년대 이후부터 이런 활동들이 본격화한 것이다.
다인종 문화를 전공했다는 베다니교회의 최병호 목사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살던 때까지 포함하면 14년째 자신이 직무를 맡고 있는 교회에서 입양 관련 행사를 열고 있다고 했다. 베다니교회에서는 올해가 8년째 행사다. 이날 행사는 캠프보다 짧은 당일행사긴 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입양 관련 캠프와 비슷한 트렌드를 타고 시작됐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교회의 한 신도는 참석자 인원에 대해 예년에 비해 조금 적은 스무 가정 정도가 참석했다고 전했다. 가정 수는 많지 않았지만 한 가정당 적어도 둘, 많게는 서넛의 아이들과 또 어른들이 참석했고, 교회의 행사 봉사팀과 그 가족들까지 어림잡아 200명 가량이 저녁 한때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1부와 2부로 나눠서 진행된 행사에서 처음 시작은 함께 밥을 먹는 일이었다.
뷔페식으로 마련된 한국 음식을 먹는 동안 이웃 교회에서 원정 나온 청소년 사물놀이팀 공연을 관람하고, 곧이어 제니퍼 페로씨의 발표가 이어졌다. 태어난 지 4개월 반 만에 미국으로 입양돼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의 전형적인 백인 마을에서 자란 페로씨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이 살 곳으로 애틀랜타를 골랐다고 했다. 한인 인구가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페로씨는 현재 한인 밀집 지역인 귀넷 카운티의 한 공립고등학교에서 교감을 맡고 있다.
30분 가량 진행된 발표에서 페로씨는 2007년에 '포인트 메이드'라는 필름 회사가 만든 다큐멘터리의 일부분을 보여주며 자아를 찾아 헤맸던 자신의 36년 인생 여정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발표에 나선 이유는 "어린 입양아들이 앞으로 성장하면서 내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한국 커뮤니티와 연결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미국 가정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 중요성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한인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