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소위 강남 교육특구 소재 양전 초등학교 김현룡 교장선생님이었다. 그 옛날 초등학교 재학 시절 훈화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존경스러운 교장선생님~~ 내용은 35명 정도의 선생님들께서 관광버스 한 대를 타고 문화체험학습을 떠나려고 하는데, 옛 선비정신과 북촌 한옥마을이야기를 묶어서 문화탐방 해설을 맡아줄 수 있는가하는 제안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문화전도사'를 자처하는 처지에서 5월 일정이 너무 빠듯한데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응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지식과 재치로 무장한 젊은 선생님들을 옛 선비이야기로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었다. 봄날의 북촌 한옥마을이 너무 예쁘니 감수성이 예민하신 여선생님들이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금세 빠져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백탑청연'은 탑골공원에 있었던 백탑 주변에 거주하면서 실학사상과 북학사상을 펴나갔던 연암 박지원과 그 제자들인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의 끈끈한 학문적 만남과 풍류정신을 상징하는 말이다. 역사소설가 김탁환은 이들의 이야기를 장편소설 <열하광인>에서 잘 표현했다.
일주일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책자를 만들기 위해 주력했다. 워낙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정통신문을 통해 체험학습 신문을 만들어오라고 주문하는 선생님들이 아니신가? 함부로 제작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애 엄마가 무지 고생했다. 사실 아이보다 애 엄마가 체험 학습하느라 고생이 더 많았다.
남편은 방콕(?) 시키고 눈도 못 뜨는 아이를 새벽부터 깨어서 등산 가방을 매게 하고는 저 남쪽 순천만부터 경주까지 기차를 타고 학습체험을 다니곤 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다녀와서는 글쓰기는 남편 몫이다. 그러니 아이를 붙들고 글쓰기 기초이론을 가르치면서 또 한편으로는 솔선수범하여 체험학습 신문 만들기에 밤을 지새우면서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어느 집 부모들이나 한번쯤은 고생을 해봤음직하다.
담당 부장선생님과 통화하여 출발지점을 낙원상가 앞 인사동 입구로 잡았다. 탑골공원 주변부터 탐방하기로 했다. 탑골공원 주변은 "한국문화의 산실"이다. 조선 말기에는 소위 연암 박지원을 포함한 백탑파들의 '백탑청연(白塔淸緣)'으로 유명한 공간이다. 소위 조선조의 '後四家'(또는 '燕門四家'라고도 불림)들이 실학을 연구하고 북학사상을 전파하던 공간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제자인 박제가가 집필한 <白塔淸緣集序>에는 선비를 좋아했던 연암의 인간적인 멋이 잘 드러나 있다.
내 나이 18 ~ 19세 때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이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에도 밥을 안치시더니 의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
연배가 다르고 처음 본 사람을 이렇게 환대한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덕을 갖춘 교양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웅은 영웅을 알아 본다'는 것이 이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자 박제가는 연암의 인품에 반해 그의 제자로 입문하게 된다.
당시에 연암의 학문이 높다는 것이 소문나고 인품도 훌륭하다는 말이 퍼져나가자 연암의 집 근처로 당시 성리학에 염증을 느끼면서 신분제도의 혁파와 이용후생의 새로운 학문의 추구에 관심이 많았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연암은 1773년 무렵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실학사상을 다듬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연암 선생의 서재 북쪽에 아정 이덕무의 사립문이 마주 서있었고, 척재 이서구의 사랑이 서쪽 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화고동의 감식가이자 화가였던 관헌 서상수의 서재가 있었다. 북동쪽 코너에는 영재 유득공의 집도 있었다. 이제 이들에게 박제가도 합류하게 된 것이다.
박제가는 연암과 연문사가의 집을 한번 방문하면, 시간 가는 줄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숙박하면서 시문과 척독(尺牘, 편지글)을 짓고 술과 풍류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이들은 서화는 물론이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변에는 음률에 밝은 효재 김용겸도 살고 있었다.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김용겸이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김용겸은 책상 위의 쟁반을 번갈아 두드리며 시경의 한 장을 읊조리게 되었다. 흥취가 한참 무르익자 그는 문득 일어나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홍대용과 연암이 뒤를 따라 찾아 나섰는데, 수표교에 달빛이 휘영청 밝은 곳에 김용겸이 무릎에 거문고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서 달을 바라보면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달빛이 은은한 곳에 술상과 안주를 차려놓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밤새도록 놀다가 취흥이 도도할 때 비틀거리며 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백탑근처부터 종각과 수표교 다리 부근까지가 한국문화와 풍류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연암은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 한문소설 12전(傳)과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저술한 <열하일기>를 남겼다.
탑골공원 근처에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자들이 모여서 시국을 논하던 곳이 문화유적으로 표석이 새겨져 존재하고 있다. 한양의원 터가 바로 그곳이다. 종로구 낙원동 146에 계성빌딩 앞에 위치한 한양의원 터는 일제 강점기 의학계의 중진 박계양 선생이 운영하던 병원 터로 당시 민족주의자였던 우국지사들인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선생 등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시국을 한탄하며 민족저항의 길을 모색하던 사랑방이었다. 이들은 120년 전의 백탑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 낙원상가에서 인사동으로 접어드는 종로세무서 골목 입구의 길목 횡단보도 중간에는 조선조 유학의 개혁을 부르짖다가 관학파의 역공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조광조의 집터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조광조(1482~1519)는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영수로 유교적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었다. 1519년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였다. 이른바 위훈 삭제운동으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결국 조광조 일파는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이다.
조광조 집터를 보고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교 앞을 지나 대원군의 주거지였던 운현궁으로 들어갔다. 운현궁에서는 구한말의 역사를 좀 더 상세하게 공부하기 위해 문화 해설사를 초빙하여 대원군과 명성왕후에 대한 역사공부를 했다.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로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 대신에 정치를 담당했다. 대원군은 고종 1년인 1864년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연달아 짓고, 1869년(고종6년)에 이로당과 영로당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고종 전용 정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었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한 개혁정책을 논의하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락당은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의 안채로서 고종 3년 1866년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왕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