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석 지음/살림터
살림터
역사의 중심에 영웅을 내세우는 영웅주의 사관의 문제점은 진짜 역사의 주인공인 민중을 역사의 변방으로 몰어내어 들러리로 만드는 것이다.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이 아무리 훌륭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슈퍼맨처럼 초능력을 갖지 않고는 한 사람의 영웅이 한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진짜 나라를 구했던 것은 전투에 임하여 죽을 때까지 싸웠던 이름 모를 민중들이다. - 본문 중 영웅의 존재 가치는 희망에 있다.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주기 위해 신화적인 영웅의 필요성은 인정하나, 역사 속에서 과도하게 틀린 영웅의 이야기는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하지 않나 싶다. 후대에 만들어진 잘못된 역사의 일례로 평양으로 쳐들어오는 수나라의 별동대 30만 군대를 강물로 몰살시킨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야기가 책 속에 나온다.
살수대첩의 가장 큰 승리 요인은 '청야(淸野) 전술'. 말 그대로 들판을 깨끗이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적군이 들어오는 길목마다 백성을 성으로 옮기고 식량을 감추고 들판에 불을 지르고 우물마저 메워 버리는 작전이다. 엄청난 식량이 필수였던 대군인 수나라는 결국 식량부족으로 서둘러 퇴각하다가 살수를 건널 즈음 집중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청야 전술로 전쟁 이후 고구려 민중은 식량 부족으로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을지문덕은 이러한 전술을 사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고, 배고픔을 견디며 희생했던 살수대첩의 진정한 주인공은 민중이 아닐까.
중국 한나라에 꾸준한 저항을 운동을 하여 일제 지배 35년보다 짧은 33년 만에 낙랑군을 제외한 영토을 되찾은 고조선의 유민들, 전쟁에 패한 중국 당나라의 의도적인 역사 기록 삭제에도 후대에 그 이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고구려 안시성 싸움의 영웅 양만춘도 민중들의 기억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꾸짖고자 하나 할 말이 없다부여씨(부여)가 망하고 고씨(고구려)가 망하고 김씨(신라)가 그 남쪽에 있고, 대씨(대조영)가 그 북쪽에 있으니 발해라 한다. 이에 남북국이라 일컬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다 (중략) 끝내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토문강의 북쪽과 압록강의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여진을 꾸짖고자 하나 할 말이 없고, 거란을 꾸짖고자 하나 할 말이 없다 - 18세기 말 유득공이 쓴 [발해고] 서문 중 몇 년 전부터 중국의 정부 차원에서 추진 중인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원·금·청 등 소수민족이 한족을 지배했던 정권도 중국사라는 것과, 우리의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 지방 정권의 역사로 포함시키는 사업의 일환이다. 이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문제되는 것은 이러한 중국인만의 역사관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계획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이렇게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우리의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위 본문을 인용한 내용과 같이 조선후기에 이미 학자 유득공이 "발해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아 우리의 땅을 잃어버렸으니 누굴 탓하겠는가"라고 한탄했던 상황이 지금의 현실과 너무도 유사하지 않은가!
중국의 이러한 행태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중국 한나라 시절 고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해, 고조선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기자 조선 할아버지'를 고려 전기 유학자들이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중국인 '기자 할아버지'를 우리 민족의 시조이자 국조로 장장 천년 가까이 숭배했음이 책의 초반부에 상세히 나와 밑줄을 그어가며 몰입하게 된다. (중국의 '기자 조선'을 그냥 받아들인 우리의 역사는 결국 1897년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역시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나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마한(馬韓)'이 고조선의 정통성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자 하는데 현재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 유물이 대부분 중국과 북한에 있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무슨 이유가 되나. 더구나 북한은 중국과 혈맹 관계라는 정치적인 이유로 중국의 우리 역사 빼앗기에 대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때만 되면 늘 일본의 역사 왜곡을 욕하고 사과를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활동을 국가 제도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면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을 가진 국민으로 치부되기 쉽상이다.
'동북공정 프로젝트'라는 중국의 우리 역사 빼앗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 때의 분노로 끝낼 것인지 진짜 우리 역사로 만들어 나갈 것인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금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으로 동북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고구려사, 발해사 전문가들이 가장 적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 고조선이 전쟁이 아닌 매국노 고위 관리들에 의해 멸망했다는 기분 나쁜 역사는 망각되기 쉬웠고, 그러한 망각이 이후 우리 역사에서 매국노가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신하는 큰 죄를 계속 저지르게 만들었다 - 본문 중 고구려가 망할 때 당나라의 앞잡이는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이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가 당나라에 가서 앞잡이가 되었다. 휘하 장수인 예식진이 반란을 일으켜 백제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에 끝까지 싸워 보지도 못하고 1만2천 명의 다른 포로와 함께 당나라에 끌려가 이주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힘을 얻은 당나라와 신라는 몇 년 후 고구려도 멸망시키고야 말았으며, 이후 한반도는 중국에 조공을 받치는 동방예의지국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고려시대 몽골족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친원파 관리들은 몽골족에게 여자들을 팔고 백성들을 착취하여 원나라의 개가 되었으며, 대한제국을 팔아먹은 이완용, 박영효, 송병준, 이용구 같은 매국노는 나라를 판 대가로 엄청난 돈과 땅을 받아 큰 부자가 되어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매국노가 나라를 팔아 개인의 이익을 얻는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한, 매국의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다시는 이런 매국노가 우리 역사에 나타나지 않도록 불리한 역사, 기분 나쁜 역사라도 쿨하게 정확히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한국 고대사의 비밀 - 선생님이 궁금해하는
김은석 지음,
살림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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