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김아무개씨 집으로 또는 간판에 ‘고향’자를 내걸은 식당으로 가 밥상 위의 푸짐한 김치가 되었을 속이 꽉 찬 저 아까운 배추들이 신원리 밭을 떠나지 못하고 선채로 로타리 쇳날에 뭉개지고 있다.
이재형
4월 28일 충남 예산군 오가면 신원리, 개복숭아꽃이 만발한 농로를 따라 로터리를 매단 트랙터 한 대가 봄배추를 심은 비닐하우스로 진입한다. 긴장한 배추들이 진저리를 치더니 로터리 쇳날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비닐하우스 안은 지릿한 냄새로 가득찼고, 트랙터를 모는 농민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비닐하우스 옆엔 또 비닐하우스가 있다.
신원리, 창소리, 탄중리. 바다처럼 넓은 비닐하우스 촌 안에서는 지금 다 큰 봄배추들이 새파랗게 질려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잔인한 봄이다.
"그 놈의 물가안정 폭탄은 꼭 농민들한테만 떨어지네 그려.""아, 대통령이 서민들 삼시 세 끼 싸게 맥일려고 그런대잖여. 그건 그렇고, 우리집 애들이 20~30만 원이나 하는 잠바를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사내야 한다는데 배춧값 내리듯 잠바값 좀 내려줬으면 좋겄네."또 다른 비닐하우스 앞에도 농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실없는 얘기에 헛웃음을 터트린다.
봄배추 값이 대폭락했다. 농민들이 두 달 전만해도 금배추로 계약 재배했던 하우스 배추를 속속 갈아엎고 있다. 모두들 "이런 도박판이 없다"며 혀를 내두른다.
올해 2월 들어 예산군의 시설채소단지인 오가면 신원리와 신암면 탄중리, 신례원 일대엔 봄배추 모종 붐이 일었다. 2010년 이상기온으로 흉년이 들어 김장 배추 3통들이 한 망 가격이 최고 2만 원까지 크게 오르자 봄배추 특수를 예측한 산지유통인들이 계약재배로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봄배추를 심은 비닐하우스 1동에, 좋게는 300만 원 이상에 계약해 말 그대로 금배추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봄배추 수확기인 4월로 접어들며 가격이 심상치 않더니 대폭락 사태가 일어났다. 4월 20일 가락동시장에서는 배추 1망(3포기) 가격이 2000원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4월 28일 예산농협직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배추 3포기가 든 한 망 가격이)1000원대까지 떨어져 아예 가격이 나오지 않으니 작업을 하지 말라는 연락을 시장으로부터 받았다"고 전했다.
4월 23일 예산읍 창소리에서 만난 한 장사꾼(농민과 계약재배를 한 산지유통인)은 "(배추 가격 폭락 전) 비닐하우스 1동당 300만 원 대에 계약재배를 했으니 원물가격만 1망에 5000원대가 나온다"며 "작업비에 운송비, 마진까지 합치면 1만 원이라도 부족할 판인데…"라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재배농민들은 "배춧값이 폭락하자 어떤 장사꾼은 잠적했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또 어떤 이는 가격 깎아 달라고 눈물로 통사정을 하고 있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산지유통인뿐만 아니라 계약재배한 배춧값 중도금을 넉넉히 받아놓은 농민들과 그렇지 못한 농민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더욱이 배춧값 폭락으로 장사꾼들이 배추를 뽑아가지 않는 바람에 후작을 하지 못하는 농민들이 애를 태우고 있어 2차 피해도 예상된다. 어떤 농민은 수박을 심는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약금 일부를 포기하고 배추를 갈아 엎고 있는 실정이다.
폭락한 배춧값, 3포기에 1000원 대... 후작시기 맞추려 갈아엎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