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용성 선생
이병렬
소설가 김용성(金容誠) 선생님께서 어제 다시는 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1940년 11월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일흔 둘이시다. 아무리 인생칠십 고래희(人生七十 古來稀)라 하여 70년을 산다는 것이 드문 일이라 했지만, 아직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젊음이셨는데 그렇게 훌쩍 떠나셨다.
일본 고베(神戶)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현재의 철도고와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마치셨고, 인하대학교와 경희대학교 강사를 거쳐 <한국일보> 기자를 지내신 뒤 줄곧 전업작가로 활동하셨다. 그러다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 2006년 2월 정년퇴임하셨으며 이후 <황순원문학촌> 촌장으로 일하셨다.
1961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잃은 자와 찾은 자>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리빠똥 장군>(1971), <도둑일기>(1983), <이민>(1998), <기억의 가면>(2005) 등 많은 작품을 남기셨고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요산문학상, 경희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두루 받으셨다.
특히 '군대 조직 내의 비인간적인 폭력 구조를 통해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을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는 <리빠똥 장군>은 문학을 꿈꾸던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읽은, 어쩌면 아주 또렷하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정년퇴임 후 아직도 써야할 것이 많다던 선생. 그렇기에 마지막 가는 길이 나를 더 안타깝게 했다. 인하대학교 교수를 정년퇴임하시고 맞은 인생의 제3부. 선생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 소나기마을>의 촌장으로 일하시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계셨다. 그리고 감기 기운에 찾았다는 병원에서 내린 암이란 진단. 당신의 병의 상태를 알고는 입원수술을 거부하고 댁에 칩거하셨단다.
선생을 뵌 어느 소설가의 전언에 따르면 암투병으로 많이 수척해지셨단다. 그런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을까. 전화와 병문안을 거절하시고 온전히 홀로 지내신 두 달여.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조용히 이승에서의 삶을 정리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런 소식을 들은 것이 바로 지난 주 있었던 한국작가교수회의 모임에서였다. 그러나 '한 번 찾아뵈야지…', '전화도 안 받으시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신다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안타까운 마음만 더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였지만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던 것은 <한국작가교수회>가 결성되고 선생이 제2대 회장을 내가 총무이사를 맡으면서였다. 선생을 모시며 일했던 총무이사로서의 일, 선생은 참 많은 배려를 해주셨고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여러 모로 힘을 써주셨다.
그렇게 공적으로는 총무로서 회장을 모셨고 개인적으로는 여러 차례 술자리를 같이 하며 그 분의 성품을 접할 수 있었기에, 게다가 그분의 작품을 읽으며 소설쓰기를 꿈꿨기에 선생의 죽음이 더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