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세워진 마오쩌둥 조각상. (2007년 8월)
최종명
그러나, 앙라 부락으로 돌아간 샹첸은 곧바로 배신을 한다. 1951년 9월 샹첸과의 정치협상이 결렬되자 모두 즉시 앙라를 소탕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시중쉰은 군사 동원을 중지하고 인내심을 발휘한다. 결국 1952년 5월 반란군과의 전투 후 샹첸이 고립돼 있을 때에도 사람을 보내 진심으로 항복을 권유한다.
8월에 이르러 샹첸은 신이나 존경할 만한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는 스카프인 하다(哈達)를 바치며 시중쉰의 손을 잡기에 이른다.
이 일은 당 중앙에 큰 힘이 됐다. 얼마 후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만난 자리에서 <삼국지연의>의 칠금맹획(七擒孟獲)을 비유하며 '당신은 제갈량보다 더 대단하다(你比諸葛亮還厲害)'고 칭찬한다.
1952년 가을 마오쩌둥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정적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에 있던 5명의 서기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인다. 시난국(西南局)에 있던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해 화둥국(華東局)의 라오수스(饒漱石), 중난국(中南局)의 덩쯔후이(鄧子恢), 둥베이국(東北局)의 가오강(高崗)과 함께 베이징에 온 시중쉰은 당 중앙선전부장이자 정무원(지금의 국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젊은 당내 일꾼들을 요직에 배치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중앙정치무대로 시중쉰을 불러들인 것이다.
시중쉰이 베이징에 온 다음해 시진핑이 태어난다. 베이징으로 이름이 변하기까지 베이핑(北平)이라 불리던 곳에서 태어난 시진핑은 아버지의 검소하고 정의롭고 개혁적인 면모를 어릴 때부터 배우며 자랐다.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으며 딸들이 낡은 꽃신에 검은 칠을 해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소박한 생활을 가르쳤다.
홍콩에서 출간되고 번역된 <시진핑 평전>(2009, 넥서스, 우밍 지음, 송삼현 옮김)에는 시중쉰의 가계도가 나온다. 모두 3남 4녀다. 배 다른 형과 누나, 친 누나 둘과 남동생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친 누나 둘은 어머니 치신(齊心)의 성을 따서 치차오차오(齊橋橋), 치안안(齊安安)이라 개명했다. 치차오차오의 회고에 따르면 '시(習)는 매우 드문 성으로 이목을 끌기 쉬워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시중쉰 역시 행정가로서,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는 일은 가급적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중쉰은 혁명과 전쟁 속에서 성장했다. 약관의 나이에 신중국의 핵심간부가 될 정도로 마오쩌둥의 찬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문화혁명 직전 '황제' 복귀를 노리던 마오쩌둥에 의해 돌연 파벌싸움의 희생양이 됐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감금과 감시 속에 살았다. 이 때문에 시중쉰의 아들 딸은 큰 고초를 겪게 된다.
9살이던 시진핑 역시 하루 아침에 온갖 난관에 봉착한다. 역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만나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시진핑은 아버지의 실각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양분을 얻게 된다. 바로 기층민들과 7년간의 동고동락을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