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방송인 김미화씨
고범중, 김현기
- 김미화씨의 10대 시절은 어떤 고민으로 가득했는지.
나는 6살부터 코미디언이 되는 것을 동경했다. 어떻게 하면 텔레비전에서 코미디프로 한번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더군다나 가정 형편도 넉넉하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다보니 더욱 코미디언이 되는 것에 몰입했다. 또 막연하지만 고생하는 우리 엄마와 가족들을 위해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 그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상고에 갔다. 졸업하던 해에 19살이었는데 코미디언이 됐다.
-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했나 ?학교에서 오락부장, 응원단장은 빼놓지 않고 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재능을 인정받아서 군부대 위문공연 사회를 내가 직접 보았다. 내가 진행을 재밌게 하니까 군인들도 많이 좋아했고 그 속에서 나도 많은 희열을 느꼈다. 군부대위문가서 사회도 보았다. 내가 사회를 잘 봐서 군인들이 좋아했다. 그러면서 오디션에 응시하곤 했는데 다들 졸업하면 오라고 했다. 그래서 졸업하고 오디션 봐서 합격했다. 그래도 어렸지만.
- 20대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물론 코미디언이 된 것. 19살에 코미디언이 되었는데 활동을 일찍 시작하다보니 어떤 분들은 내 실제 나이보다 더 높게 보기도 한다. 개그맨으로서 희화화된 몸짓, 연출, 외모 등을 어필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일자눈썹, 입 큰 개구리 등의 상징어를 만들어갔다. 그런데 당시에 코미디하면 무시하는 사조가 다분했다. 코미디언은 뭔가 부족하고 하찮다는 인식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당시 코미디 프로그램을 맡게 된 한 프로듀서가 굉장히 기분 나빠 했던 기억이 있다. 스스로 이러한 경향에 일조하는 코미디언이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고 이것을 깨뜨리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공부하며 틀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코미디언으로 꼭 성공하겠다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들은 당연했다.
- 김미화씨의 20대 초반 시절은 대한민국의 격동기였는데 무얼하고 있었나 ?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에 빠져 있었고 '쓰리랑부부'로 한참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상황이 실제보다는 덜 와 닿았다. 쉽게 말해 내 성공을 위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내 모든 걸 바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외부 상황에 눈을 돌리지 못 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선가 나를 반성해 보게 되었고 너무 많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왜 개그에 콘서트 접목 못 하나', 틀에 박힌 생각에서 탈피 - 희극인으로서 사는 것 중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준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좋아해 주신다. 내가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예인이라고 해서 다 따듯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코미디언이기에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것 같아 너무 좋다. 또 하나는 내가 코미디를 하면 사람들이 웃고 좋아한다는 것 이다. 물론 힘들 때도 있지만 나의 생각, 몸짓, 말투를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희극인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느낀다. 연예인의 여러 분야보다도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이 가장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큰 고통을 감수하며 아이디어를 짜고 몸을 던져야 한다.
- 개그맨이라는 직업 특성상 남을 웃겨야 하는데 늘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다. 힘들 때는 없었는지 ?코미디언들은 보통 힘든 일이 있을 때도 겉으로 내색하기 힘들다. 내가 살아 온 인생은 비교적 남들에 비해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편인데 나 또한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대에서 연기에 몰입하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그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고 대중들이 이것을 좋아해주고 긍정적으로 반응해주는 것이 나에게 약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한다. 만약 내가 내 안의 끼를 무대에서 풀어낼 수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을텐데 다행히 이 직업을 가져서 힘들면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힘든 일을 겪으면 심도 있게 고민하고 고찰해 보는 편인데 항상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의미를 찾아내고 긍정적인 사고로 바꾸려고 노력하다 보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때로는 어떤 일이 나에게 찾아올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한다."
-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 중 자신만의 남다른 비결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공유하는 것과 틀에 박힌 사고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고민한 것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어릴 적 동네가 가난했지만 이웃사촌들이 가족처럼 서로 나누고 공유하며 지냈고 나는 이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산다. 그러기 위해 지금도 나와 일하는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혼자만 잘 살기 위해 남에게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유화되어 굴러가는 것이다.
내가 '개그 콘서트'를 고안했을 때 일반 가수들이 무대에서 공연하고 관객들이 환호하는 콘서트의 개념이 왜 개그에는 접목될 수 없을까 ? 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지금의 개그콘서트가 만들어졌고 개콘은 지금 많은 후배들이 개그맨으로 활동할 수 있는 큰 무대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를 중시하는 것과 틀에 박히지 않고 달라지려는 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듯 현재도 앞으로도 영원한 희극인"- 전에 비해 희극인으로서 활동이 많이 줄었다. 언제 다시 활발하게 활동할 것인지 ?언제든지 가능하다. 다만 보시는 분들이 모르는 시사프로의 어려움이 있는데 가령 나는 대중 연예인임에도 방송국 직원같이 매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보통의 연예프로들을 보면 일주일에 생방송이 없거나 한 번에서 두 번 정도로 하는 반면 시사 라디오의 경우는 일주일 내내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또 시간도 6시에서 8시다 보니 다른 개그프로나 연예프로에 출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성격이 하나에 충실하고자 하는 성격이기에 더욱 치열하게 시사 프로그램에 열정을 쏟았고 대중 연예인으로서 시사프로그램을 맡는다는 부담감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노력했기 때문에 이외의 일을 잘 하지 못했다. 나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미래에도 영원한 희극인으로 남을 것이다.
- 미래의 엔터테이너 김미화는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나 ?인식과 문화라는 것이 느리게 바뀐다. 현재 우리나라의 연예문화를 보면 젊은층들이 주류이고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의 경륜을 존중하기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찾아 대체하는데 열을 올린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일조를 하고 싶다. 가령 미국이나 유럽을 보면 나이 많은 사람들의 경력을 존중해주고 그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인정한다. 이 부분이 참 부러운데 우리나라에서도 무대에서 늙어가고 싶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되도록 하는데 노력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지금 당장 잘 나가는 젊은 친구들과 겨뤄도 지지 않을 만큼의 준비를 하고 있고 또 자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