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노동세상
인터뷰 : 이춘자 <노동세상> 발행인정리 : 김조경민 객원기자 드라마 <추노>의 주인공은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결국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다. 현대엔 그런 일이 사라졌을까.
박경석(51)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은 "'장애인'이라는 딱지는 노예처럼 하나의 신분으로 적용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꿈꾸는 걸 넘어서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의 터전, 노들장애인야학의 박 교장을 지난 3월 20일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노들야학 사무실에서 만났다. <노동세상>에 실린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상임이사 사진을 보고 박 교장이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건 에바다 재단 정상화 투쟁이었단다.
"당시 인권운동사랑방이 혜화동 로터리에 있었는데 계단이 많아서 장애인에겐 반인권적이었죠.(웃음)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죠. 도움 많이 받았어요. 구 비리재단의 실세를 몰아내려고 둘이 같이 용감하게 학교 앞에 갔다가 똥물을 뒤집어썼죠. 난 휠체어 타서 도망도 못 가고 더 많이 맞았지." 오랜 투쟁 끝에 사회복지시설 법인을 유일하게 바꾼 에바다 투쟁은 지금도 혁명 같은 일로 기록돼 있다.
이날 장애인 자립생활 투쟁을 하다 사망한 한 열사의 2주기에 다녀왔다고, 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이끌며 지하철 선로에 목숨 걸고 내려갔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저 원래 조용한 사람이에요.(웃음)" 늦은 오후, 박 교장의 호탕한 웃음이 섞인 재치 있는 말솜씨로 그의 삶과 장애인 운동사를 들었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1983년에 사고로 척추장애 입어"
- 비장애인으로 살았을 때도 장애인 문제를 고민하셨나요?"저는 중도장애인입니다. 1979년에 대학교 1학년 다니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1983년에 사고로 척추장애를 입었어요. 비장애인이었을 때는 장애인 문제를 거의 몰랐죠. 다만 고등학교 때 클래식 기타를 쳐서 연주회에 갔다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기타 치는 걸 보고 '아, 장애인도 잘 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어요.
장애인이 되면 기분이 좋지는 않잖아요? 인생 종쳤다고 생각하지.(웃음) 저도 6개월 병원 치료받고 나서 5년 동안 집구석에만 있었어요. 그러다 1988년 서울장애인복지관에 가서 직업훈련을 받으면서 그 당시 장애인 운동 하던 사람들을 만났고요.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과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인 노력을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란 걸 알게 됐죠."
당시 대학생들은 필수적으로 1년에 한 번씩 문무대에 입소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박 교장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머리를 길렀는데, 교관이 그걸 자르고 때리려 한 것을 피해 도망친 게 '훈련거부'가 되어 강제징집을 당할 뻔했단다. 엎친 데 덮친 격,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그냥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고. 비교적 일찍 간 군대에서 낙하산 타는 재미를 알게 된 그는 제대 후 행글라이딩 동아리에 들었는데, 첫 경기에서 그만 사고를 당했다. 당시 나이 스물 넷. "잘 노는 게 인생의 기쁨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다가 인생을 조졌으니 얼마나 허무했겠습니까?"하고 그는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 집에만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일단, 5년 동안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러던 중에 뭔가 해봐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생겼어요. 기독교 집안이라서 몸은 망쳤어도 죽고 난 뒤에 하늘나라는 가야 한다고, 꼭 교회는 데려갔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외출을 하면서 살았던 거죠. 어떻게 보면 교회가 세상과의 끈이었어요. 교회 소개로 1주일에 한 번씩 영어 선생님도 오셨거든요. 지금은 형수님이 됐는데, 그분 덕에 대학을 다시 갈 정도로 실력이 늘었죠.
그리고 병원에 치료받으러 다니다 만난 친구와 잠깐 연애도 했어요. 그 친구가 장애인 특수교사라서 서울장애인복지관을 소개해줬어요. 거기서 전산과 공부를 했는데 정태수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운동도 제대로 못하면서 운동권 노래만 불러댔던 친구죠. 또 목공 수료생 박흥수 선배를 만났어요. 청계천에서 장애인 노점상투쟁, 빈곤투쟁, 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거부투쟁 등을 조직하셨던 분이죠. 저는 뭣 모르는, 한 번 살아보려고 직업훈련 받으러 갔던 순진한 사람이었는데….(웃음)"
- 복지관에서 직업훈련을 받은 뒤에는 취업을 하셨나요?"서울장애인복지관을 1년 다니고 수료한 뒤에 흥수 형, 태수와 함께 점거농성에 들어갔어요. 이유가 있어요. 복지관에서는 서울시에 졸업생 90% 이상이 취업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제가 동문회장을 맡아서 설문조사를 했더니 전혀 다른, 비참한 결과가 나온 거예요. 취업률도 정말 낮고, 취업해봤자 5만 원 정도 주고 3개월 다니라는데, 3개월 다니면 잘려서 다시 돌아오고. 그러고는 그건 너희 장애인 탓이라고 하는 게 현실이었어요. 이런 걸 알리는 소식지를 냈더니 복지관에서 그걸 압수해 버려서 농성에 들어갔죠.
계기는 그랬지만 목표는 대책 없는 장애인복지에 대한 문제제기였어요. 복지관에서 그렇게 보고 안 하면 실적이 없다, 그러면 예산을 못 받는다, 그러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복지관을 이해할 수는 있어요. 효율의 잣대로 고용을 보는 사회구조가 원인이니까요. 의무고용률도, 장애인고용촉진법도 없던 시절이잖아요. 농성을 한 달 넘게 했는데 답이 안 나왔죠. 서울시가 변해야 하는 문젠데, 끄떡이나 하겠어요? 그래서 제도 문제는 제도 문제로서 푸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90년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이라는 양대 법안투쟁을 진행하는 계기가 됐어요."
- 그 후 장애인문제를 깨닫게 된 과정이 궁금하네요."흥수 형이 술을 사준다기에 열심히 따라다니며 먹었죠, 일명 알콜약물치료.(웃음) 그러다 장애인 문제를 알게 되고, 권유를 받아 태수랑 같이 공부했어요. 1981년 전두환의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 아래, 공무원·국민연금 등 복지제도의 근간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선 사회적 약자에겐 해줄게 없나 해서 만든 게 바로 심신장애자복지법입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법안 하나를 그대로 베낀 건데, 우리는 쓰레기 같다고 평가했어요. 전혀 실효성이 없었거든요.
그때 서울장애인올림픽 거부투쟁을 하고 나서 장애인단체도 많이 만들어지고 조금씩 인식도 변화하고 조직적 노력이 이루어지면서 1990년에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이 돼요. 그리고 그해에 '장애인의 날'을 만들어줘요. 비가 잘 안 오는 4월 20일로. 굉장히 '은혜로운' 날을 만들어서 장애인복지를 한다고 선전했죠. 팔 잘린 사람들이 스포츠를 하면 아름답게 보이잖아요? 장애 극복했다고 눈물 막 짜내고. 개인적인 인간승리를 장애인복지로 포장했죠. 같은 해에 '장애인고용촉진법'이 만들어지는데 200명 이상 사업장에 2% 의무고용이 핵심이에요. 이렇게 양대 법안투쟁을 했죠."
- 양대 법안투쟁이 갖는 의미가 있을 텐데요."그 전에는 명망 있는 장애인 한 명이 대통령 부인한테 가서 울고불고 봐달라는 식이었어요. '성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 돌보자.' 이런 식으로 선전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양대 법안투쟁은 많은 장애인단체가 조직되면서 스스로 주도해갔어요. 각 장애인단체들 성격이 다 다른데 흥수 형이 있던 곳은 그 중에서도 '빨갱이' 같은 데였어요. 장애인문제를 계급적인 문제와 같이 바라보고 노점상투쟁 같은 실천적인 노력을 현장에서 만들어가려고 했죠.
당시 중증장애인이 가난을 해결하는 방식이 주로 '앵벌이'였어요.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리어카로 노점상 만들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했어요. 도로의 턱도 그냥 없애달라면 안 해주니까 직접 망치 들고 가서 깨부수는 투쟁도 했었죠. 이런 장애인 청년운동들을 조직하는 과정을 흥수 형이 했어요."
- 장애인 청년운동은 어떤 운동이었나요?"법안투쟁이 끝나면서, 조직돼 있던 장애인계가 나뉘기 시작했어요. 그 중 결국은 계급적 문제 해결 없이 이것만 달랑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쪽에서 1990년에 활동가 조직인 장애인청년운동연합회(이하 장청)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활동가만 모인 거예요. 현장과 대중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1993년에 만든 게 바로 노들장애인야학이에요. 제가 대학 동기들 꼬셔서 야학 교사하라고 했죠. 전 처음에는 안 했는데, 제가 꼬신 교사들이 자기들만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고 뭐라 하기에 저도 교사대표 등 여러 가지를 했죠. 1997년에는 교장까지 되고.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했던 대다수가 노들야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장애인들, 교사들, 그리고 단체들이에요."
"삶에 전환점 마련해 준 사람들이 모두 세상 떠났을 때 가장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