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 (57)

57. 너의 데칼코마니

등록 2011.04.13 17:32수정 2011.04.1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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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어봐. 좀 전부터 저기서 뭔 소리가 나고 있단 말야."


나는 일기장을 옆으로 밀며 조그만 소리로 조제에게 속삭였다. 그리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우린 살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그 소리는 내가 발로 톡톡 차는 바람에 튀어나온 벌레들이 들어오고 나갔던 그 풍선같이 부풀어있던 돌기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사락사락하며 아주 부드러운 실크에서 나는 것 같은 작고 가녀린 그 소리는 어느 순간 문득 그치더니, 이윽고 그 조그맣고 탄력있는 돌기가 또다시 조금씩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소리가 그치는가 싶을 즈음 와인 코르크가 스크류의 마지막 펌프질을 끝내고 내는 힘차고 탄력있는 '팡' 소리처럼 멋지고 산뜻한 효과음이 뒤따르고 나자 금빛의 머리칼을 늘어뜨린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

 

이윽고 좀 더 힘차게 그 돌기를 비집고 그 머리가 들이밀어졌을 때 조제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건 다름아닌 클럽 멘도사에서 멜레나 곁에 붙어서 칭얼대던 그 꼬맹이였기 때문이다. 나와 조제는 멍하니 꼬맹이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동시에 반가움을 담뿍 담은 목소리로,


"어! 너 어쩐 일이야?"


하고 외쳤다. 그러자 꼬맹이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을 샐쭉하니 오므렸다. 어쩐지 애가 평소보다 몸이 좀 부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신경쓸 겨를이 아니었다. 꼬맹이는 팔랑거리는 코발트 블루빛의 원피스를 입고, 지난 밤에 내가 작업실 냉장고에서 막 꺼내 놓았던 미도리 리큐르처럼 투명하고 맑은 그린빛 오간디로 만든 리본을 머리에 달고 있었다. 그리고 팔에는 황금빛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지독히 경계하는 눈빛을 굴리며 안겨 있었다. 꼬맹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윽고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를 슬쩍 털어냈다.

 

그건 지독히도 슬로모션으로 보여졌고 조제와 나는 '쟤가 왜 저래?' 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별꼴 다보겠다는 눈빛을 주고 받고 다시 꼬맹이 쪽으로 시선을 두다가 다음 순간에 너무 놀라 앉은 걸음으로 뒤로 벌벌 기어가며 나자빠졌다.


"악!아아악!"


꼬맹이의 머리 뒤에서 뭔가가 꿈적 꾸물거리며 머리칼을 헤집는 것 같더니 샐쭉한 표정의 꼬맹이 머리 뒤쪽에서 뭔가가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 머리카락을 헤집고 나타난건 또 하나의 꼬맹이 얼굴이었다. 분명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두개 달려 있는 괴상한 형체로 둘은 똑같은 얼굴에 쌉쌀한 표정을 가득 담은 채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팔랑거리는 푸른 원피스를 입고, 머리엔 둘 다 똑같은 그린색 리본을 단 두 개의 머리는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그 리본이 서로 맞붙기라도 할라치면 데칼코마니 처럼 꼭 정대칭의 그림이 되어 거울 이편의 얼굴을 보는 것 같만 같은 환영에 휩싸이게도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지?"


둘은 동시에 화음을 잘 섞은 아리아라도 부르는 듯이 운을 떼며 우리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하나는 소프라노, 하나는 알토의,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음색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얼굴을 지탱하기 위해 평소보다 거대해진 것 같은 몸뚱아리, 거기에 달린 두 팔에는 황금빛 고양이가 쏘아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고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뭔가를 꿰뚫어보는 강렬하고 번개같은 불을 내뿜는 눈길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어렴풋한 꿈 속에서 슬쩍 스쳐지나가던 꿈속의 그 여자, 얼굴은 알 수 없지만 그 여자가 안고 있던 고양이의 두 눈빛, 정확히도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불같은 눈빛이란 걸 나는 금세 알아채버렸다.


"뭐....뭐야? 너!"


조제는 화다닥거리며 일어서더니 꼬맹이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두 개의 머리 중 하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옆의 머리에게 소곤소곤 뭐라고 귀엣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머지 하나의 머리가 의미있는 표정으로 조제를 쓱 쳐다보며,


"너희들을 기다렸어. 그립고도 그립게.."


그러자 머리를 갸우뚱하며 예쁜 척을 하던 다른 하나가,


"너무도 오랫동안."


하고 소프라노 화음으로 한마디 덧붙이며 한쪽 손을 허공을 향해 살며시 내밀었다. 그러자 이제 한쪽 팔에 겨우 안긴 형국이 된 고양이는 야옹거리며 앞발을 세워 대롱거리기 시작했고, 꼬맹이의 징그런 두 개의 머리는 고양이의 그 몰골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이윽고 나와 조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더니 천천히 발을 움직여 우리 곁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가왔다.


"오지 마!오지 마! 너, 너 대체 뭐야?뭐냐구!"


조제는 잡아뜯어먹을 듯이 고함을 지르며 옆에 있던 미니어처 술병을 집어들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얼른 조제의 손목을 확 잡아채고는 힘을 주어 누르곤 부들부들 떨리는 내 손을 피해 버둥거리는 조제를 잡아채느라 손톱에 날을 세우며, 꼬맹이와 고양이의 두눈을 번갈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갖고선 제대로 너를 살펴볼 수가 없어."


그건, 분명히 아주 분명히, 고양이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이었다.

2011.04.13 17:32ⓒ 2011 OhmyNews
#중간문학 #판타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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