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에서 연길로 오는 산길 풍경. ‘왕청’, ‘연길’ 모두 고원지대여서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을 자주 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종안
잘 달리던 버스가 지치는지 힘겨운 소리를 냈다. 오르막길인 모양이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바싹 마른 나무숲이 산허리를 휘도는 구름을 병풍처럼 가려주면서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의 유작을 감상하는 것 같아서였다.
중국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들 하는데 '되는 것도 많고 안 되는 것도 많은 나라'로 바꾸고 싶었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 항상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비쳐지기 때문이었다.
자리가 잡히니까 박 시인은 청소년을 상대로 퀴즈풀이를 했다. '안중근 의사 호 알아맞히기',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 호 맞히기', '독립운동가 열 분 성함 호명하기' 등을 해서 정답을 맞히는 학생에게 상품권을 주었다.
도마 안중근, 우당 이회영은 쉽게 맞혔는데 독립운동가 열 분 성함 호명하기는 한 사람도 통과를 못하고 6~8명 선에서 그쳤다.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으나 웃고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속으로 손을 꼽아보았더니 나 역시 학생들과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조선족자치주에서 중국말 쓰노. 여기는 조선이야!'뒤에서 한 학생이 "여기 차 번호판은 '吉' 자로 시작하네여!"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차들의 통행이 잦아지는 것으로 연길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박 시인은 오녕성 심양(선양)발 연길행 비행기에서 가슴이 짜릿했던 목격담을 털어놓았다.
"3년쯤 되었나. 심양에서 연길 가는 비행기에서였어요. 국내선이어서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 방송을 했어요. 그런데 말쑥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야이 간나시키들아, 조선족 수도로 가는 비행기에서 왜 꼬무랑말로 안내하노!'라며 격노하더라고요."박 시인은 할아버지 표정으로 볼 때 트집을 잡거나 술김에 하는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으며 '이따위 비행기는 폭파시켜야 해!'라고 할 때는 가슴이 철렁했었다며 말을 이었다.
"조선족 사회에서 70대 이상은 대부분 중국어를 모릅니다. 우리말만으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되니까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민족의식이 강한 노인들은 연길에서 용정 가는 버스표를 끊을 때도 큰 소리로 '용정!'이라고 외칩니다. 젊은이가 요녕성을 '랴오닝성'이라고 발음하니까 '왜 조선족 자치주에서 중국말 쓰노, 여기는 조선이야!'라며 혼내는 노인도 봤어요."박 시인은 혼나면서도 그러한 노인을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젊은이도 많다며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한·중 수교(1992년) 이후 부모가 한국으로 나가는 바람에 학생들이 모자라 통폐합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는 것. 조선족 학생 70%가 조선어를 모르는 것도 큰 문제라며 앞날을 우려했다.
부모가 한국이나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할머니 손에 자라는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과일을 사 들고 양로원을 찾아 노인들에게 신문도 읽어들이고, 노래도 불러들이고, 안마도 해 드리는 등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남다르다고.
요즘엔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거둬주고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경제적인 도움을 못 주었으니 거둬주는 게 당연하다는 노인이 많단다. 옛날 같으면 자연스러운 양육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다니, 만주도 그만큼 자본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6개월만에 다시 찾은 연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