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생일을 맞으신 시어머니.
김혜원
"할머니가 어리광부리고 싶으셨던 거야" "어머니께서 요즘 잘 드시지를 않고 기력이 없어 하세요. 그래서 링거를 두 병 맞혀드렸거든요. 이번 주에 한 번 더 다녀가시면 어떨까요?"요양원의 전화를 받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며칠 전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순댓국을 사다 드렸더니 맛있게 잘 잡수시더라는 형님의 전화를 받았기에 며칠 뒤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에 느닷없이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남편과 저는 바로 요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거실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계실 어머니가 침대에 앉아 계십니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응. 입맛이 통 없어서 먹지를 못해. 그랬더니 혈압이 또 떨어졌나봐."어머니는 봄을 무척 타는 편이십니다. 해마다 봄바람이 살짝 돌 때가 되면 입맛을 딱 잃고 며칠씩 누워 계시는데 올해 역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집에 계실 때처럼 링거도 맞고 어머니 좋아하시는 별식도 조금씩 드시면 금방 다시 좋아지실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형님이 집에서 도토리묵 만들어왔어요. 양념도 맛있게 됐네. 드셔보세요."형님이 만들어 온 도토리묵이 입에 맞으셨던지 몇 번은 맛있게 받아 드신 어머니는 점심시간이 되자 다른 할머니들과 식탁에 둘러 앉았습니다.
"입맛이 없어. 밥을 못 먹겠어.""어머니 오늘은 조금만 더 드세요. 내일은 도가니탕 해올게요. 초간장에 도가니 찍어 드시는 것 좋아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만 더 드세요. 그렇다고 안 드시면 당도 떨어지고 혈압도 떨어져서 큰일 나요." 싫다고 하시는 어머니를 달래서 밥을 떠 넣어드리는 저를 보고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십니다.
"할머니가 어리광이 부리고 싶으셨던 거야. 며느리한테 어리광부리고 싶어서 그러셨구먼."그렇게 어머니를 어르고 달래서 겨우 밥 반 공기를 떠 넣어드리고 가져간 카스텔라를 간식으로 드린 후에, 내일 도가니탕을 끓여 가지고 다시 온다는 인사를 하고 요양원을 나왔습니다.
식탁에 앉아 떠나는 우리를 향해 "그랴. 잘 가고, 낼 와"하면서 손을 흔들어주시던 어머니.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동서, 어머니가... 어머니가..."다음 날(3월 27일) 남편과 저는 아침 일찍 교회에 갔습니다. 주일이니 일찍 예배를 드리고 어머니를 찾아뵈려는 생각이었지요. 예배가 다 끝나가는 10시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전화기의 진동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주일 오전에 올 전화가 없는데…'하고 전화기를 꺼내보니, 형님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전화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받지를 않았더니, 두 번, 세 번 계속 전화가 울리는 겁니다.
'형님이 이럴 분이 아닌데 왜 자꾸 전화를 하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떨리는 심정으로 예배당에서 나와 전화를 받으니 형님의 목소리가 먼 데서 들리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울립니다.
"동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어머니가…."머릿속이 온통 까매지며 다리에 힘이 풀려옵니다. 곁에 있던 남편이 무슨 일이냐며 저를 쳐다보는데 뭐라 해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응…. 여보, 형님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나도 모르겠네. 당신이 다시 물어봐. 잘 못 들은 건지 모르겠어. 갑자기 뭔 소린지. 어제도 봤는데 무슨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그길로 달려간 요양원. 어머니는 요양원이 마련해준 별도의 방에 잠자는 듯 누워 계셨습니다. 편안한 얼굴, 따뜻한 온기, 홍조 어린 뺨. 무엇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얼굴을 만져보고, 손을 만져보고, 귀에 대고 "어머니, 어머니"라고 불러보아도 깊은 잠에 빠지신 어머니는 눈을 뜨지 않습니다. 코 밑에 살짝 손을 대어보니 숨결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응급처치를 한 간호사와 의사가 사망시간을 알려주었지만, 30분도 지나지 않아서인지 흔들고 불러 깨우면 저만치 갔던 어머니의 영혼이 다시 돌아오실 것만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