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 (56)

56. 끝없이 목마른

등록 2011.04.01 17:53수정 2011.04.0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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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25일

지난 번 탱고 파티에서 만난 식물업자는 내게 어떤 알뿌리를 건네며, 이런 식물들은 반드시 차가운 기온에 어느 정도의 시일을 보내고 이듬해가 되면 꽃이 피도록 생장이 맞춰져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꽃이 피거든 내가 그 이름을 붙여보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사람이 시련을 견디면 더 단련되듯이 이 식물도 추위를 견디면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식물이란 그런 점에서 많은 교훈을 주는 존재라고 했다.


저녁이 되었을 땐 주방 창가에 노을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탱고'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만들어 보았다. 부모님이 보내 주신 돈 중의 아주 약간을 헐어서 드라이진과 드라이 베르무트, 스위트 베르무트, 오렌지 퀴라소 같은 재료와 세이커를 카페 주인에게서 사 왔던거다. 탱고 스텝의 미묘한 분위기를 표현한 칵테일인데, 세이커에 흔들어서 최종적으로 잔에 부어보니 붉은 색의 정열적인 액체가 완성되었다.

나는 잔을 들고 서재의 등나무 의자에 파묻혀선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혀를 대 보았다. 쓴맛과 단맛이 나는 베르무트가 베이스인 진과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주는 칵테일은 탱고 스텝처럼 현란한 느낌을 심어주었다. '열정적인','관능적인', 그리고 '끝없이 목마르게 하는' 이란 탱고의 이미지를 잘 표현해보려 한 듯한 칵테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혀끝에서 감도는 오렌지의 아련한 느낌은 평온하고 포근한 그리움을 내 마음 속에 깊이 남겨주었다.

조금씩 잔이 비워져갈 무렵 아파트 정원을 거쳐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옆집 여자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얼른 복도로 나가서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내려 현관문 앞으로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와는 이제 제법 친해진 탓에 사소한 이야기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던거다. 여자는 깜깜한 한밤중에도 썬글라스를 끼고 슈퍼에 다녀오거나 했는데, 가끔씩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선글라스 사이로 빨갛게 멍든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눈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오늘은 선글라스를 벗은 상태였다.

나는 식물업자에게 받은 알뿌리 중 하나를 그녀에게 건내 주었다. 퇴근 중이던 그녀는 때마침 들고 오던 여성 패션지를 건네주었다. 자신이 에디터로 일하는 회사에서 이번 달 호로 나온 것이라 했다. 유달리 과감하고 아방가르드한 옷 취미를 가진 여자란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하는 끄덕임이 들었다. 그녀는 비싸진 않지만 감각이 좋은 옷을 골라입는 재주가 있어서 보라와 연두가 추상적으로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는 재킷이나 터틀넥 티셔츠를 구경할 때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거실로 들이곤 칵테일을 다시 한잔 만들어서 대접하며 지난 번 탱고 파티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치유와 회복의 춤이란 의미로 심장병이나 우울증 환자의 치료에서 탱고가 사용되기도 하고, 연인이나 부부간의 심리적 갈등 회복에도 도움을 주는 춤이며, 치료의 한 방법으로 정착되었다고 들은대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굉장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탱고치료사들이 심적인 갈등을 겪는 연인들을 탱고 음악과 동작을 통해 그들 각자의 내면의 슬픔과 우울을 토로하는 과정을 겪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 하니 그녀의 표정이 조금 심란해졌다.


나는 그녀를 잠깐 기다리라 하고 서재로 달려가선 옷장을 열었다. 그리곤 지난 번 탱고 파티 때 멜레나가 아르헨티나에서 사들고 온 선물이 든 상자를 꺼냈다. 거기엔 붉은 빛의 탱고 드레스와 은색 광택이 감도는 매우 아름다운 탱고 슈즈가 담겨져 있었다. 멜레나의 취향을 살려 고른 듯한 옷은 등과 가슴 부분이 많이 파여져 있었고 옆선과 뒷선이 길게 터져 있었다. 그리고 찰랑거리며 몸에 붙어 좋은 촉감을 주는 옷감들에는 수많은 비즈들이 촘촘히 박혀서 아름다운 실루엣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옷의 주인공이 돼버렸지만 제법 만족한 나는  슈즈도 신어보았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가니 옆집 여자는 제법 술잔을 많이 비우고 바다 쪽으로 하염없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인기척에 돌아보곤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행히도 별로 수선하지 않아도 될만큼 옷이 적당히 들어맞는다고 칭찬해 주었다. 슈즈도 발을 깔끔하게 감싸주는 고급 가죽제품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채로 우린 서로 팔을 붙잡고 스탭을 밟아 보았다. 탱고 음악은 없었지만 파도 소리가 장단을 맞춰주는 초가을 저녁, 마지막 더위 한 가운데서 두 여자의 어설픈 탱고 흉내는 조금 서글픈 느낌도 들었다.


<계속>
#중간문학 #판타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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