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들의 모습에서 한국식 칙릿영화의 현 주소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주)토리픽쳐스
이렇게 영화는 하이패션 '블랙 미니드레스'를 통해 20대 여성들의 성장과 욕망을 절절하게 조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상위 5%에 들 정도로 가진 게 너무 많은 그녀들의 자기연민에서 출발한 영화의 캐릭터는, 가진 게 너무 없는 대다수 88만원 세대의 빈곤과 내밀하게 소통하는 데서 줄곧 엇박자를 놓습니다. 그러다 보니 치열한 생존의 터전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상처투성이 성장은 보이지 않고 압구정동의 화려한 네오사인과 클럽과 마사지 숍으로 대변되는 얄팍한 욕망만 분출됩니다.
그녀들이 부딪친 현실의 벽이 강조될수록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솔직하게 담아내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빗나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20대 여성들의 속물적 욕망과 섹스를 알맹이 없이 적나라하게 그려낸 <섹스 앤 더 시티>의 한국판을 자임하거나 감각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여성들의 판타지를 솔직하게 드러냈다면 한편의 트렌디한 CF물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여자는 된장녀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된장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좋아한다"는 유미의 대사처럼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영화 속 그녀들 간의 이해의 폭은 물론 '된장녀에게도 고민은 있다'는 메시지로 관객들과도 공감의 폭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마블미>가 이 영화 저 영화를 패러디하면서 20대 여성들의 현실과 이상을 짜깁기하다 기우뚱거리는 절름발이 신세를 면피 못한 이유입니다.
한국의 칙릿영화는 <로제타>를 만들 수 없을까칙릿영화도 88만원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충분히 녹여낼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땀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나오는 일상의 단면을 촘촘하게 짜들어 간 스토리라인에 발랄한 유머와 위트로 담금질해 삶의 무게를 절감하며 성장해 가는 대표적인 리얼리티 영화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88만원 세대의 아픔을 과장없이 사실감 있게 그려낸 <고양이>를 잇는 영화가 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비록 <고양이> 속 다섯 명의 그녀들이 <마블미>의 그녀들처럼 멋지게 빼입지도 못하고, 강남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지 못해도 상처투성이가 된 마음을 함께 어루만지며 서로를 보듬는 과정을 보며 관객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공감과 소통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의 한 여상을 나온 10년 전의 그녀들이나 대학을 졸업한 지금의 그녀들이나 한국사회의 88만원 시대의 좌절과 절망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마블미>는 멀게는 <고양이>와 가깝게는 <내 깡패 같은 애인>처럼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에 무릎 꿇기엔 '나는 아직 젊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합니다. 한 톨의 씨앗이 동토의 대지를 뚫고 새싹이 되고 마침내 제 땅에 탄탄히 발을 딛고 선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자신만의 나이테를 가슴에 품으라고. 그리고 힘찬 심장의 박동을 벗 삼아 끊임없이 현실의 벽에 도전하라고.
이제 남는 몫은 20대 그녀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시난고난한 선택과 도전과 성장에 격려를 아끼지 않을 칙릿영화입니다. 마치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로제타>가 벨기에에 청년실업 해법인 '로제타 계획'(Rossetta Plan)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듯이, 그녀들과 칙릿영화의 건투와 연대가 한국사회에서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한국판 <로제타>를 직조해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욕심이 과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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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녀들의 배부른 고민, 88만원 세대 열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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