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작전이 시작된 1945년 3월 23일 늦은밤,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 오키나와 현립 제 1고등 여학교 학생 222명, 교사 18명은 나하시의 남동쪽 5킬로미터에 위치한 하에바루에 있던 오키나와 육군병원에 배속되었습니다.
3월 26일 미군은 게라마 열도에 진격하였고,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이 중부서해안에 상륙합니다. 미군이 남하하자 일본군의 사상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학생들은 후송되어 온 부상병의 간호와 물긷기, 밥짓기, 시신 매장 등에 쫓겨 잠시 논을 붙일 틈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5월 하순 미군의 공격이 가속화되자 학생들은 일본군과 함께 육군병원을 나와서 본섬 남단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동한 지역에서의 안정도 잠시, 격렬한 대포 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6월 18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날 학생들은 갑작스런 '해산명령'을 받고 절망하였고, 이미 미군에 포위되어 버린 전장을 헤매며 도망가다가 이들 중 일부는 포탄으로, 일부는 가스탄으로, 또 일부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육군병원에 동원되었던 교사와 학생 총 240명 중에 136명이, 재향부대 등에서 9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군은 오키나와전을 일본 본토 침공의 거점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작전으로 위치시키고 최대한의 물량을 사용했던 반면, 이에 대항하는 일본군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서 방공호에 잠복해 시간을 끄는 방위 지구, 작전을 취했습니다.
오키나와를 수비하기 위해 일본군은 오키나와 현민을 송두리째 동원하는 계획을 세우고 학도단을 편성해 학생들을 강제로 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시간을 끌기 위한 일본군의 지구전 때문에 12만여 명에 달하는 오키나와 현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만 지금도 전장의 참상은 우리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쟁터로 향하게 했던 그 시대의 교육에 대한 무서움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인구의 과반수를 넘고, 아직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국내,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체험한 전쟁의 공포를 끊임없이 전해갈 필요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해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죽은 학우와 교사를 위한 진혼이라 믿으며, 우리는 이땅에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을 건설했습니다. 이 기념관이 설립되기까지 현 내외 많은 분들의 성원과 협력에 힘입었습니다.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 1989년 6월 23일 재단법인 오키나와현 여자사범 제 1고등여자 히메유리 동창회-
※ 전쟁체험자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보다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은 2004년 4월 전면적인 전시개조를 실시했고 한층 더 평화의 소망을 미래로 이어나가기 위해 '평화의 광장'을 증축했습니다. (히메유리 기념관, 한국어 안내 자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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