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동굴 속의 탱고(51)

51. 지독한 분노

등록 2011.03.04 10:24수정 2011.03.0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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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편 .
희망의 이편.일러스트 - 조을영
▲ 희망의 이편 . ⓒ 일러스트 - 조을영


 

인형웨이터는 지난 번 세탁 시에 다시 달았다는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내 옆에서 일기장을 건너다 보았다. 조제도 말이 없었다. 이제 열망사냥꾼의 뱃속은 도서관이 되어버린 것 처럼 적막감만 감돌았다.

 

1999년 8월00 일

파도..밤...오늘 저녁의 해안가는 유달리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바닷가에 자리한 예술극장에서 클로드 룰루슈 감독의 기획 상영 영화를 보고 밤이 이슥할 즈음에 해안 도로를 걸어왔다. 정박해 놓은 하얀 요트는 저 멀리 철교 위의 화려한 네온 불빛을 받아서 더욱 새하안 빛깔로 자신의 몸을 드러냈고 밤이 깊어갈수록 바다의 어둠도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요트는 그 가운데로 조용히 묻혀버렸다. 그건 지금 현재의 내 모습과 흡사해서 눈물이 조금 나왔다.

 

그와 장난같은 결혼을 한 이후로 달라진건 특별히 없다. 예전에 살던 집과 쓰던 물건들은 중고 매장에 헐값으로 넘겨달라고 중개인에게 말하고, 그는 도망치듯 내 집으로, 내 일상으로 불쑥 들어와 버렸다. 어느 틈에 이 집은 쫒기는 자들의 아지트가 돼버린 기분이다. 나는 그 놈들의 시달림을 견디다 못해 내 세계를 찾아 이곳으로 찾아들어서 이젠 어느 정도 그 상흔을 감추고 있지만, 언제 다시 재발할 지 모르기에 항상 마음을 졸이고 있다. 그리고 부모님께 아무런 기별도 하지 않은 채 그와의 인생을 시작해 버렸단 자책감에 한동안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 이내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적어도 혼자는 아니란 사실에 마음이 편안해졌다는게 진심일 것이다.

 

오후 1시가 되면 그는 부스스하게 눈을 뜨고 근 40분 정도 공들여 입욕을 겸한 샤워를 하고 면도를 깔끔하게 한다. 20대 후반의 프라이빗 스타일리스트가 그 시간이면 현관 초인종을 누르고 서재 겸 파우더 룸에서 그의 외출 준비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고 싶다고 선포한 그 바로 다음 날 고용한 사람이었는데, 다소 우울한 얼굴의 이 남성은 과묵하고 붙임성은 없었지만 일에는 프로페셔널했다.

 

그는 살짝 컷을 할 미용 가위와 적당하게 피부톤을 커버하기 위한 메이컵 도구들을 재빠르게 꺼내놓고, 옷장을 열어서 오늘 입고 나갈 옷과 악세서리를 고르며 고객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한채 수건을 뒤집어 쓴 문제의 고객은 방안 가득 헨델의 음악을 틀며 들어선다. 그리곤 오늘의 일정을 간단히 이야기 하고는 그에 맞게 스타일링과 패션 연출을 부탁한다.

 

오늘 그는 조직 폭력배 부두목과 만날 예정이다. 사실 이제 그의 직업은 선생이 아니다. 나와 그가 이젠 사제지간이 아니듯 그도 선생이란 단어를 23층 아파트 창밖으로 가벼이 팽겨채 버린 것이다.

 

그는 거울 속에 비치는 스타일리스트에게 앞머리를 깨끗하게 드라이 컬링해 달라 부탁한다. 오늘은 그 부두목이 총괄하는 쇼핑플라자에 가는 것이 예정된 스케줄이란 말도 덧붙이면서.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바닷가에 근사하게 지어진 하얀 건물의 외관이 달력의 그림처럼 아스라한 바로 그곳이다.

 

부두목과는 오랜 식구나 다름없이 지냈다며 오늘 일이 잘 될 경우 그 쇼핑 프라자에서의 핵심적 인사 발령이 유력하다고 그는 어제 저녁 내 귓가에다 말했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알게 됐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도 이내 이불 속으로 머리를 디밀고는 말없이 팔을 뻗어 나를 가만히 안았다. 그리고는 내 등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그의 볼에서 흐른 땀이 내 등으로 흘렀고 그는 소중하고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실크 이불 자락과 함께 부드럽게 나를 감싸안고는 귓가에다 뜨끈한 숨을 뿜어내며 다시 한 번 천천히 내 몸을 더듬었다. 그러던 중  까칠하게 딱지가 앉은 그의 팔뚝 상처가 가슴께에 느껴져 나는 화들짝 눈을 떴다. 그가 전처와의 일련의 일들로 팔뚝에 수차례 그었던 자살흔은 지금의 안정된 모습과 어우러져 더욱 애달파 보이기만 했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침 출근 전의 그는 거울 속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애써 팔목의 그 흉터를 감추고 쾌청한 얼굴로 이야기를 한다.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좋은 형님과의 만남이라고 과장된 말투와 웃음을 보이면서... 큰 병을 앓고 난 이후에 생에 대한 의지가 더욱 강해진 사람처럼 그는 많이 바뀌었고, 이제는 평온이 찾아온 착각도 들게 했다.

 

이윽고 모든 의식이 끝나고 깔끔한 복장을 한채 그가 식탁 앞에 앉는다.

"지금부턴 공부에 시간을 더 쏟아야 하지 않겠어? 당분간은 각방을 쓰면서 너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자."

 

그는 빵 조각을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열어둔 서재에서 울려퍼지는 피아노 연주에 귀기울이며 나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햇살 속에는 미세한 먼지가 여름 날의 곤충 떼처럼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것 따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불어버리거나 닦아내버리면 그만인 거다.

 

"최대한 너를 위한 삶을 살거야."

 

그는 딸기와 생크림을 곁들인 크로와상 위에 단풍시럽까지 듬뿍 올리고는, 자신이 만든 그 신선한 산의 형상을 섬세하게 지켜가며 빵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그것만은 확실해. 난 두 번의 실수를 만들지는 않아. "

 

두번의 실수?그건 나도 용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가진 힘이 없을지언정 조금씩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분노가 그 어딘가에서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몸 속에 응축되어서 나를, 이 나를 끝없이 자학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언젠가는 대단한 크기로 커져서 나라는 실체를 삼켜버릴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그 마개를 열고 싶지가 않다. 아무리 삐져나오려고 한들 억지로 막고 또 막을 것이라고, 야무지게 빵을 씹는 그를 보며 속으로 다짐 또 다짐했다.

 

그리곤 해가 지기를 기다린 후 외출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지금은 내가 가야 할 길이 따로 있다는 생각으로 겨우 감정을 참고 참았다. 이후 밖으로 나왔을 땐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요트는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혀 버렸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이어폰을 새로 꽂고 볼륨을 좀더 높여보았다. 그리곤 문득 집 쪽으로 돌아보았다. 불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 귀가를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셔츠 깃을 휘날리며 근처 카페 이층으로 발자국 소리도 없이 올라갔다. 그리고 최대한 정신을 집중한 채 파도가 만들어내는 불협의 화음을 하나하나 세었다. 계단을 오를 동안 등뒤의 유리창에선 밤바다의 거센 파도가 집채 만큼이나 크게 몰아칠지 모른단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적어도 이곳은 높은 해안 언덕이니까 그 어떤 곳보다 안전하리란 생각을 안은 채 마지막 하나의 계단까지 힘있게 오르고 창가쪽 자리에 가앉았다. 그러자 밀물처럼 안도감이 따라왔다. 나는 이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높이까지 저 거대한 광란의 미치광이들이 따라오진 못한다.

 

<계속>

2011.03.04 10:24ⓒ 2011 OhmyNews
#판타지 소설 #중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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