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박사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정치철학 특강 시즌2' 강의를 하고 있다.
권우성
"예전에 보릿고개 시절이 있었죠? 혹시 우리에게 보릿고개가 있었던 시절보다 박정희가 경제개발해서 보릿고개가 없어진 시절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면 벤야민은 배우기 어렵습니다. 두 시절이 '똑같다'고 느끼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벤야민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에서는 보릿고개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박 전 대통령 이후는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철학 VS 철학>의 저자 강신주 박사는 "억압받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며 "나아졌다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조갑제를 비판할 수 없다"고 말했다(굶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니 나아졌다고 말한다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치적을 긍정하는 사람을 비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강 박사는 지난 2월 23일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정치철학 특강 시즌2 - 역사철학, 혹은 기억의 투쟁'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교재로 진행된 이날 강의에서 강 박사는 "벤야민은 계속됐던 억압의 역사를 들어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며 "우리 대부분은 지금 자신의 삶이 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벤야민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인 발터 벤야민은 <일방통행로> <역사철학테제>를 쓴 철학가이며 다수의 평론작을 남긴 문학평론가다. 강 박사는 벤야민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강의를 시작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현대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유는 '비자발적 기억'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보면 마들렌이라는 빵을 홍차에 풀어서 스푼으로 한입 떠먹자 순간적으로 유년의 기억이 펼쳐지는 장면이 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왜곡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기억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의식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들을 아름답게 채색해서 기억하는 경향이 있기 쉽습니다. 맞아서 생긴 흉터를 보면 순간적으로 폭행에 대한 기억이 확 떠오르죠? 비자발적 기억이란 그런 식으로 왜곡되지 않은 기억을 의미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세기 인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이 벤야민입니다."벤야민은 자본주의의 '비자발적 기억'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해부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하기위해 자본주의가 실질적으로 뿌리를 내렸던 19세기,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향했다. 강 박사는 "벤야민은 왜곡되지 않은 '진짜 자본주의'를 알기 위해 파리에서 10여 년 동안<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같은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파리가 독일군에게 함락됩니다. 평소 히틀러를 비판했던 벤야민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스페인으로 도망가던 중 여의치 않자 자살을 해요. 그리고 그가 남겼던 자료들을 1980년대 이후 조르주 아감벤이라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내 책으로 묶어냅니다. 이 책이 19세기 자본주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역사와 변증법에 대한' 자료묶음들을 토대로 <역사철학테제>가 쓰여지거든요. <역사철학테제>는 말하자면 벤야민의 사활을 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의 종결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