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론>(존 롤즈 저/황경식 역) 책표지.
이학사
<정의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이 책이 갖는 의의를 알아보자. 현대 인권사의 흐름에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두 가지 사조라 할 수 있다. 하나는 공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다. 공리주의는 벤담으로 대표되는 철학자들이 주장한 것인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 즉, 한 사회의 정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사상이 우리 사회의 정의관에서도 압도적이다.
국회에서 예산 관련 토론을 하면 백이면 백, 공리주의적 접근을 한다. 국회의원들은 입만 떼면 다수의 국민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결론을 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공리주의다. 그런데 이 접근방법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렇다. 소수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공리주의적 셈법에 의하면 소수자는 어쩔 수 없이 버려지는 패이다. 이 방법은 결코 소수자와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소수자 인권을 존중한다면 공리주의적 접근방법에 항상 찬성표를 던질 수가 없다.
다음으로 사회주의는 세상 사람을 소수자와 다수자로 나누지 않고 모두를 똑같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은 경제적 평등의 대가로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한다. 평등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자유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 신체의 자유 또한 그렇다. 절대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몸도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인간의 신체도 언제든지 권력행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의론>은 위의 두 가지 도전에 대하여 일정한 답을 주기 위해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리주의를 넘어 소수자에게도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사회주의를 넘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무엇에 동의해야 할까. 어떤 원칙 하에 사회를 조직하면 사람들은 그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를까.
이런 것이 바로 롤스가 <정의론>을 통해 만들어 내고자 했던 꿈이었다. 롤스는 그 꿈을 이 책을 통해 이루어냈고, 그랬기에 이 책은 롤스의 필생의 역작이 되었다.
사회제도의 제1 덕목은 정의자, 이제부터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정리해 보자. 나 또한 별 능력은 없지만 성의를 가지고 <정의론>의 엑기스에 접근해 보려 한다. 우선 롤스가 정의의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 만일 우리가 사회를 계약에 의해 만든다면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일까.
롤스는 그것이 바로 정의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증진에 관심을 가진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들 누구나가 가장 공정한 상태(원초적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을 말한다. 그는 이에 대해 책의 초반에서 간명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사상체계의 제1 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36쪽)정의론의 내용은 무엇인가이제 <정의론>의 핵심에 도전해 보자. 700쪽이 넘는 방대한 이 책에서 롤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롤스는 책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말을 요약해 놓았다. 그것을 중심으로 이 세기의 책 <정의론>의 핵심을 엿보자.
[원초적 입장에서의 정의의 원칙]사회계약을 연상시키는 원초적인 입장에서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이 무엇일까. 위에서 본 대로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어떻게 할당할 것을 합의할까. 또한, 사람들은 그 사회가 만들어 낸 사회적 부를 배분하는 원칙을 어떻게 세울까. 이에 대해 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정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정의의 원칙이다. 롤스는 이렇게 말한다.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이한 두 원칙을 채택하리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원칙은 기본적인 권리의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며,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예를 들면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49쪽)이것을 좀 부연 설명해 보자. 이것은 크게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차례로 보자.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원칙은 롤스 이론의 제1원칙이라 불린다. 한 마디로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제1원칙은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자유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롤스는 제1원칙을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표현한다.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400쪽)그렇다면 여기에서 기본적 자유가 무엇일까. 롤스는 그 목록을 제시한다. 정치적 자유(투표의 자유와 공직에 취임할 자유), 언론과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 사유재산권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다만, 롤스의 사유재산권에서 주의할 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는 이 권리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논자에 따라서는 롤스를 급진좌파라고 하는 모양이다.
위의 권리 목록은 오늘날 인권 목록에서 말하는 자유권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 면에서 롤스의 정의의 제1원칙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롤스가 정의의 원칙을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그의 정의관은 19세기 계몽철학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롤스의 진면목은 다음에서 말하는 제2원칙에서 발견된다.
[차등의 원칙]다음으로 롤스 이론의 제2 원칙은 무엇일까. 이것은 한 사회의 경제적 원칙을 말한다. 과연 사회의 부는 어떻게 분배되어야 정의의 원칙에 맞는 공평한 것이 되는가. 완전 평등을 추구해야 할까. 아니면 불평등을 용인해야 할까. 만일 불평등을 용인해야 한다면 어떠한 한계 속에서 용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롤스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하는 불평등한 분배는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이 말은 롤스가 하나의 조건 아래 불평등, 즉, 차등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불평등한 분배가 가능하려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모든 사회적 가치(자유, 기획, 소득, 재산 및 자존감의 기반)는 이들 가치의 전부 또는 일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단순한 불평등은 부정의가 된다." (107쪽)그런데 롤스에게 있어 관심사는 사회 구성원 중 하층민(최소 수혜자)에 대한 배려이다. 즉, 차등의 원칙은 한 사회의 최소 수혜자의 이익에 부합되어야 한다. 이것은 불평등한 분배가 된다 해도 그것이 용인되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만일 평등한 자유와 공정한 기회균등이 요구하는 제도의 체계를 가정할 경우에 처지가 나은 자들의 보다 높은 기대치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것이 사회의 최소 수혜자들의 기대치를 향상시키는 체제의 일부로서 작용하는 경우이다." (123쪽)차등의 원칙에서 롤스가 노리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획일적 평등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적 평등에서 나타난 생산성 감소의 약점을 보완하는 길은 인간의 이기적 심리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기초로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이 경우 능력 없는 사람에게 원래 자신의 기여도 보다 조금 더 분배가 가능하다면 능력 있는 사람에게 분배비율을 늘인다고 해서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등의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불평등은 구조적일 수밖에 없다. 부모 잘 만나면 영원히 잘 사는 체제는 정의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출발점이 다른 상황에서 경쟁을 해 보았자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완전한 평등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능력은 같이 평가되어야 한다. 가난한 부모를 둔 똑똑한 자식이 부자 부모를 둔 똑똑한 자식과 인생사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책임 아래 내린 선택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용인할 수 있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으로 인생이 불평등해지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롤스의 생각이다.
[평등적 자유주의] 위에서 본 것을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롤스의 정의의 제1원칙(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시민의 기본적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정의의 제2원칙(차등의 원칙)은 자유주의적 권리가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명무실한 빈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 사회주의적 인식의 핵심이다. 롤스는 두 원칙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사회를 구상한다. 그것은 최소 수혜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자유주의다. 그래서 사람들은 롤스의 정의관을 <평등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을 권리개념으로 말하면 제1원칙은 자유권과 관련이 있고 제2원칙은 평등권 혹은 요즘 말하는 사회권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가끔 충돌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예를 들면 경제적 평등이 요구되는 경우 자유를 유보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개발독재 시대에 왕왕 제기되는 딜레마다.
우리에게도 70~80년대 수많은 사례가 있다. 독재자의 논리는 우선 성장을 해야 하니 그동안은 자유를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를 위해 독재를 인정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롤스는 이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롤스는 말한다. 만일 자유와 경제에 서열을 만들 필요가 있다면 단연코 자유가 먼저라고.
"제1원칙이 제2원칙보다 우선하는 서열적 순서로 배열되어야 한다. … 제1원칙이 요구하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에 대한 침해가 보다 큰 사회적 경제적 이득에 의하여 정당화되거나 보상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106~107쪽) 무상급식 논쟁과 <정의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