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_6_청국영사관이진칸에 남아있는 당시 청국영사관
라영수
고베는 일본에서도 지진 피해를 많이 본 곳이다. 최용신 선생이 고베여자신학대학을 입학하던 한해 전에도 큰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최근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1993년 <칸사이 대지진>에 진원지가 고베 중심가로 모두가 폐허가 되었고, 재건설을 통하여 산노미야 중심가는 현대적인 국제도시로 탈 바꿈 되었다.
보기는 좋으나 최용신 선생이 걷건 길은 아니므로 우리는 지나쳐 버리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고베여자신학대학가 있었던 키타노미야로 갔다.
어둠이 깔리는 롯고산을 바라보며 키타노미야 민단(民團)을 찾아 김정수 사무장 선생을 만났다. 민단은 칸사이대학 성화캠퍼스와 가까워 김정수 선생은 고베여자신학대학이 성화로 바뀌고 다시 칸사이 대학으로 합병되었다는 정보를 주어 이번 답사의 문을 열어준 분이다.
같이 저녁을 들며 감사의 말과 함께, 최용신을 모르는 김정수 선생에게 <상록수>를 길게 설명하니 감격하였다. 이튼 날 우리는 최용신 선생이 필히 가보았을 오사카 성을 들렀고, 나라(奈良)를 찾아 방목하는 사슴들을 보았다. 최용신 선생님은 인자한 손으로 필히 사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다음 날, 가까운 교토(京都)도 들러야 하였으나 우리의 일정이 허락하지 않아 오사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각기병을 운명이라 체념한 최용신 선생은 코베에서 학업을 중단한다. 당시 고베에 있었던 약혼자 김학준에게 신앙심을 돈독히 하도록 권유하며 자신이 못다 한 세계를 향한 공부를 마쳐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고베에 있었던 동생 용경이와 오빠에게도 한 맺힌 이별을 하고 최용신 선생은 부관연락선에 올랐다.
다시 샘골로 온 선생은 다음해 1월 23일 조선농민의 모든 아픔을 가슴에 안은 채 하늘나라로 가셨다. 모든 환경이 절벽처럼 둘러싸인 속에서도 희망과 열정을 버리지 않고 싸워온 최용신 선생의 땀과 눈물을 우리는 찾고자 하였다. 희망을 향한 창구 고베에서 최용신 선생은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어떤 고민을 하였을까를 추적하여 작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사람 최용신의 자취를 계속 추적하기 위하여 태어나 자란 원산을 갈 것이며, 최초의 농촌 활동을 하였으나 실패했던 황해도도 답사한다. 더구나 북한에서도 최용신 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어 자료의 공유와 공동연구도 제안할 계획이다.
우리는 최용신을 땀 내나는 우리의 생활 속으로 모시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힘들 때 항상 옆에서 추슬러 우리의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용기를 주시는 후덕한 할머니로 모시고자 하는 것이다.
현해탄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