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시위 현장에 투입된 군30일 이집트 카이로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 군인과 탱크가 투입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62명이 사망했다는 정부발표와 달리 전국적으로 적어도 89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25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전해진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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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에 우선 가장 먼저 용감하게 일어나준 튀니지 국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뒤를 이어 이집트, 레바논, 예맨 그리고 알제리가 깨어났다.
이집트에서 '분노의 날(1월 25일)' 민중시위가 일어난 지 오늘(1월 29일)로 닷새째다. 이미 새벽. 더운 나라답게 이집트의 시위는 오후 4시쯤 시작 되었다가 이맘때쯤이면 최고조에 달한다. 26일, 나는 조심스럽게 출근을 했다. 우리 회사가 카이로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까닭에, 무려 정오까지도 나는 출근을 망설였다.
회사임원들과 몇 차례 통화를 한 끝에 타운 내의 시위가 어느새 가라앉아서 정상을 되찾았다는 '믿을 수 없는' 대답을 듣고 출근한 나는, 그러나 출근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 "Lee, 어서 달아나! 수천 명이 시내로 몰려오고 있어!"라는 외침을 들어야했다. 혼비백산 회사를 나와서 택시를 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두 차례나 갈아타야 했고 종내에는 집까지 30여 분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27일, 28일 나는 단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촉이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몇몇 내가 아는 한국교민들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그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미 곪을대로 곪은 나라였다. 언제 터져도 터지게 되어있다면 지금이 최적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때를 놓치면 이집트는 현 대통령(호스니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이 대권을 승계하고 5선 연임을 마치게될 30년 뒤나 기약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집트가 본격적으로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분노의 날'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27일 금요일, 시위대는 제2의 D-day를 예고했고, 무바라크의 30년 정적이던 앨 베더레이가 자진 입국하였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금요일 모스크에서의 예배를 마친 뒤 가택연금되었다. 그의 입국으로 나는 이제 이 국민이 끝까지 가보려하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구심점 없이 군중시위가 성공해도 문제라고 우려한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럽 몇몇 채널에서(우리집에서는 위성수신안테나로 그나마 세상을 볼 수가 있다) 벌써부터 '무바라크 그 다음'을 조심스럽게 점치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의외로 이집트에는 무바라크의 정적이면서도 현명하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이 제법 있었다. 엘바라데이마저도 자신이 아니어도 이집트는 무사히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은 자신을 가둔다고 시위가 멈출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는 무바라크에 대한 경고성 발언이었다. 이제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인데 스스로 무바라크의 입 안으로 걸어들어온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무바라크가 그대로 그를 씹어삼킬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이빨 빠진 호랑이였음을 드러낼 것인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다.
28일, 29일 이집트 전역에서 모바일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도 끊겼다. 오바마의 강력한 요구로 모바일은 29일 낮 통신이 가능해졌다. 한국의 형제들에게 모바일로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들에게 전화를 드리지 못한 것이 맘에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들 라싣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웬 난리들인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했다.
"해야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거야. 한국도 오래 전에 그랬단다. 대학생들이 일어났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대통령이 무릎을 꿇었지. 그리고 한국은 지금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집트는 한국보다 많은 것을 가진 나라야. 국민들이 이렇게 산다는 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증거야."라싣은 곰곰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29일 현 대통령 무바라크가(어쩌면 소요가 시작되었던 25일부터 딴에는 열심히 궁리한다고 한 끝에) 내어놓은 성명은 민중시위에 기름통을 들이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집트를 수호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내각에 총사퇴를 요구합니다. 시위대에 보복은 없을 것이며, 내일(개각 후)부터 이집트인들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것들을 공평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그는 '자신'을 쏙 빼놓고 모든 책임을 현 정부에 고스란히 떠넘겼다. 무바라크의 대국민담화가 발표되고 오바마가 '그가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믿는다'는 지원사격을 발표하자마자, 금요일 예배 후 다시 한 번 일어났던 이집트 국민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퇴진할 의사가 없음을 확실하게 깨달은 국민들은 여기서 물러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절대위기를 느꼈음에 틀림이 없었다.
29일 시위는 비단 시위에 그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시위진압에 동원되었던 군인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카이로에서는 지역마다 총성이 난무하고 화염이 치솟아올랐다. 군인들이 시민을 상대로 총알을 발포했다는 목격자들이 등장했고, 희생자도 늘었다. 한 의사는 28일 하루에만 60여 명의 부상자를 치료했다는 증언도 내놓았다. 어느덧 카이로 북부 델타지역의 반정부 시위는 수도인 카이로보다도 더욱 거세어졌다.
또한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남자들이 시위대에 합류한 즈음 일반주택과 상가일대를 상대로 무자비한 약탈과 차량방화가 자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카이로 남부의 마아디지역에서는 외국인여성들만을 상대로 성적인 폭행과 약탈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시위에 나가지 않은 '집에 남아 있는' 남자(혹은 청소년)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와 주택가를 직접 순찰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골목마다 그렇게 많던 경찰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경찰이 약탈꾼들 틈에 섞여있었다는 제보도 등장했다. 은행은 불탔고 ATM기기 내의 화폐들은 도난당했으며 알렉산드리아 최대의 쇼핑상가인 'Caffoure'는 약탈자들에 의해 거덜이 났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집트 <Nile tv>는 카이로 인근의 감옥에서 무려 1000여 명의 죄수들이 무기를 훔쳐 달아났다고 보도했다. 교도관들이 모두 달아난 때문이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29일 저녁 약탈사건이 발생했다. 라싣도 주민경호대 300여 명에 합류하러 집에 있던 쇠몽둥이를 빼어들고 나갔다.
29일 저녁 <CNN>에 무바라크 현 이집트대통령이 경찰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육공군본부가 모두 주둔해있는 이곳 Heliopolis는 하나의 요새와도 같은 지역이다. 또한 카이로 국제공항을 끌어안고 있어서 이집트 정부의 최고위관리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해외도주를 할 수도 가족들을 빼돌릴 수도 그리고 내국인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지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며칠간의 투쟁 끝에 사람들은 알아차리고 말았다. 자신들에게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이 자신들이 뭉쳐 하나의 거대한 힘을 이끌어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Heliopolis의 젊은이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군대는 더 이상 그들의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새벽마다 순찰을 도는 이 젊은이들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모두 군간부들이거나 고위직 공무원들이다. 그럼에도 약탈자들을 막아주지 못하는 군대에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몹시 실망했고, 새삼 비장해진 듯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상가가 혹은 어느 지역이 약탈자들에 의해 당했다는 소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9일 대통령궁을 지나야할 일이 있었다.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이 난국에 사재기 장보기라도 해두어야할 것만 같아 나서던 길이었다. 대통령궁 주변으로 반경 1km 이내의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탱크들이 곳곳에 보였으며 군인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국내시위에 무장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향해 쏘려는 것인가 말이다.
내가 장을 보러간 씨티스타 지하의 spinners 수퍼마켓은 박리다매를 원칙으로하는 대형수퍼이다. 장보기를 해야할 때라는 위기감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는지 나는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둔 물품들을 싣느라 함께 간 딸들을 행여 잃어버릴까 챙기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오후 2시면 그 자체로 초대형 백화점이기도한 씨티스타 건물을 군대가 봉쇄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무려 한 시간여를 계산대 앞의 긴 줄에 서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모든 시민은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성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런 통행금지는 28일에도 있었지만 29일에는 금지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29일 내가 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 믿고 있다. 이미 모든 은행이 영업을 중단하였고 ATM기기들이 약탈되는 마당이 아닌가말이다. 희생자가 늘어날수록 시위대에게나 정부에게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서로 격한 감정만 더해질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에게는 너무나도 억울하게 외신에서는 온종일 '카이로는 무법천지'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미 군에 대한 제어력도 잃은 듯이 보이는 대통령이 왜 이리 일을 힘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항간에서는 '무바라크은 미제(메이드 인 어메리카)'라는 조롱이 돌고 있다. 나는 그가 이집트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대통령다운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하루 속히 퇴진하여 그의 조국과 국민들에게 안정을 되찾아주기를. 30일 무바라크의 최대 정적인 엘바라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무바라크는 아직까지도 (민중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1월 30일] 아파트 단지 위로 날아다니기 시작한 군용 헬리콥터30일은 나에게나 우리 아이들에게 매우 긴 날이었다. 겨울방학여행이 무산되고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된 아이들은 갑갑해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침대맡에 패킹해 놓은 여행용 트렁크 안의 옷들을 절대로 치우지 않고 온종일 들락날락하며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아이들은 자신들의 갑갑함을 표현했다. 불안하고 갑갑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어린 딸들의 손에 빗자루와 막대스폰지를 쥐어주었다.
"우리 간만에 청소하자!"아이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순간만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우리가 모두 미치기 전에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벌써 두 번째 모바일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받았다고 연락을 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것 또한 나를 몹시 예민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모바일 크레디트 카드를 구입할 수 있는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으므로 함부로 국제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웬만한 통화는 집전화를 이용했고 모바일 발란스는 비상용으로 남겨두어야했다. 인터넷은 여전히 닫혀있었고 스마트폰을 눌러보아도 여전히 먹통이었다.
나는 시험삼아 스마트폰의 '메시지 보내기'를 통해 아이들 사진 한 장을 찍어서 한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받았다는 회신이 없어서 그도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미심쩍었다. 게다가 아파트단지 위로 전날과 다르게 군용 헬리콥터들이 대거 이동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우리 아이들은 창문 근처로는 가려고하지도 않았다. 지구상에 우리만 달랑 남은 것같은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낮에는 아이들에게 청소를 시켰듯이 저녁에 나는 각자 영어단어 20개씩을 외우라며 아이들을 책상 앞에 강제로 앉혔다.
'평소와 다름없이.' 내 머릿속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과일을 깎고 주스를 만들어 아이들 책상 앞에 놓아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들이 두려움이나 충격따위를 받을 틈도 생각할 틈도 주지 않으려고 말이다.
나는 온종일 나에게 연락을 하는 이가 없음에 서운해했던 생각을 고쳐먹기로 하였다. 내가 아는 교민들 중에는 자의든 타의든 혼자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나처럼 '위기에 닥쳐 아무도 안부를 물어주지 않아 서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나는 교민명부에 등록되지 않는 지인들이 제법 되는 관계로 이들을 상대로 대사관 대신 연락을 취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거주민 등록을 하지 않아 어쩌면 우리 대사관이 미처 그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교민명부에 오래 전 전화번호가 올라있기도 하였다. 오후까지 나와 연락이 닿은 이들은 모두 열 사람이었다. 그들 중에는 혼자서 지내는 이도 있었고 가족과 함께 체류하는 이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비상 전세기가 뜬다'는 나의 정보에도 이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시큰둥했다는 사실이었다.
"안 갈 거예요? 화요일, 목요일 두 차례 대한항공이 온다는데.""그냥 있어보려고요. 심각한 것 같지도 않고.""그럼 언제 모바일이 다시 끊길지도 모르니 우리 서로 집전화번호를 알아두면 좋겠어요.""Lee씨 말대로 합시다. 번호 불러주세요."그들은 나의 제의에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나는 '꼭 남을 것같은 사람' 교민 몇이 연락이 닿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머지 않아 모바일이 다시 끊길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나의 예전 전화번호수첩을 뒤지는 손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심지어 지난해 대사관 주최 교민모임에서 만났던 나이 든 선교사분까지 떠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의 소재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대사관에서 연락이 닿았으면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나는 그분과 접촉하려던 시도를 접어야 했다. 홀로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몇몇 지인들과는 천만다행으로 연락이 되었고 몇은 한국행 전세기를 타겠다는 결심을 밝혀주었다.
"고마워요 연락해주어서.""아니에요. 조심하세요."그들도 나처럼 '두려움 속에서 극한의 소외감'을 느끼는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연락을 해준 나에게 감사했지만 나는 내 연락을 받아준 그들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확인이 몹시 고마웠고 비상연락망이 서서히 갖추어져가는 것같아 기뻤다. 두려움은 혼자일때 훨씬 커진다. 함께 갈때 멀리 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대화하며 웃었고 두려움을 잊었으며 희망을 주고 받았다.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평소 마주치면 눈인사나 하든지 바쁘면 그냥 지나치기도 했던 우리는 마치 아주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처럼 서로를 반가워했고 모처럼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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