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시집을 준비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책과 작가와의 만남 3] 권택명의 <예루살렘의 노을>

등록 2011.02.10 18:09수정 2011.02.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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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수의 보따리에서 나온
노란 빛깔의 화사한 한복 한 벌
청색 공단 두루마기 하나
누런 세마포들 속에
어울리지 않게 곱게 개켜진 옷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단정한 해서체 한자의
한지 서한 한통
염습 절차를 설명하던
30대 중반쯤의 장례식장 여종업원
어머니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혼수단자라 한다
시집올 때
혼수를 충분히 못해준다 하여
외종조부가 혼수대여가라는
가사집을 필사해주었다는 얘기 생각나
나는 빛바랜 그 단자를 펼쳐보지 못하고
관 속 어머니 가슴 위에 올려드렸다
<어머니의 꿈>-권택명

 권택명 시집
권택명 시집송유미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어떤 존재일까. 내가 좋아하는 바슐라르는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한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고 얘기한다.


그렇다. 삶이 또 시만 따라간다면 삶 또한 시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권택명 시인은, 시와 삶을 조화롭게 살아온 시인이라 하겠다. 권택명 시인은 금융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권택명 시인(외환은행 나눔재단 상근이사)은 근 40년간 금융계의 업을 천직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시작(詩作)의 세월 또한 40여년 세월이다. 근간에 발간된 <예루살렘의 노을>은 권택명 시인의 다섯번 째 시집이 된다.

권 시인은 초등학교 때부터 동시를 쓰기 시작해서, 학창(중·고) 시절 <학원 문학상> 등 을 수상했고 1974년 박목월 시인의 월간지 시지 '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정식으로 데뷔했다. 외환은행 도쿄지점에서 통산 7년을 근무한 관계로 일본문인들과의 문학교류활동 및 다양한 장르의 번역을 해 왔다. 일·한 번역서로 장편소설 <하얀 가을>외 다수가 있다.

권택명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예루살렘의 노을>은 주로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과 일상 속에서의 자기 성찰, 자연과의 교감 및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기구 및 성찰 등 기독교 신앙의 원체험의 영적 세계 등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김수복 시인은 아래와 같이 그의 시세계를 축약한다.

권택명의 <예루살렘의 노을>편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시들이 신앙적 승화를 기원하는 상상력을 근간으로 하면서, 일상 속에서의 신성을 추구하는 이제까지의 자세에서 신앙의 원체험을 시화하는 자세로의 전진은 바로 그의 신앙 시학의 한 완성으로 보인다.

이는 존재의 시원의 상징인 '배꼽'을 통한 지난 삶의 자성과 성찰의 자세에서, 은혜와 은총의 부드러운 생명의식으로, 그리고 삶의 신앙적 승화로 이어지는 사랑과 은총의 신앙 시학으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이순을 맞아 펴내는 이 <예루살렘의 노을>의 표제시가 담고 있는 신앙시학의 한 모습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꽃으로 상징되는 신앙의 낙원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신앙적 축복 속에서도 '배신의 웃음'이 있고, '죄없는 그를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이 있어도 '울지 말자'고 되뇌며, 올리브 숲에 잠기는 예루살렘의 노을'을 바라보는 화자의 모습에서 바로 일상의 온갖 고통과 회한 속에서도 은혜로운 은총을 기원하는 일상 속의 성자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권택명 시인과 일본 문인 외
권택명 시인과 일본 문인 외송유미

오랫동안 배꼽의 용도를 몰랐다//오랜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주말 오후/ 대중탕 거울 앞에 설 때나/어머니 투병기간 동안/ 때로 짜증스럽기도 했던 내면/ 과민성대장증후군 복통으로/위 아래 구분하여 청진기를 댈 때/잠시 의식하곤 하던 곳//이제 어머니 가시고/배꼽은 회상의 통로가 되었다//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었을/ 6. 25 피난길/퇴각하는 인민군으로 오인한 기총소사에/동네 사람 수 명이 죽었다는 동네 저수지 둑/ 만삭의 어머니 뱃속에서 들었을/B29 폭격기 소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박토조차 넉넉지 못했던 한촌의 시집살이/ 말수 적은 맏며느리 어머니 태줄에 매달려 받은 영양으로/ 이순 가까운 나이를 그대도 큰 병 없이 살았을 터//배꼽으로 탯줄의 흔적만 남은 후/혼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여기고 살아온 세월/ 어머니 하늘나라 가시고/배꼽은 은혜와 회한의 증거이다
<배꼽>-권택명


신화에 있어, 배꼽이 인체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자궁 안에서는 탯줄로 모태와 맺어진 매듭이라는 점에서, 생명의 핵심, 인체의 중심, 모태의 원형성 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태중의 아이를 잇는 탯줄은 한 생명이 다른 한 생명에게 삶을 공급한다는 데 있어서도 생명의 근원줄이 된다.

뿐만 아니라 모태 속에 있을 때 태반과 연결되어 있는 모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는 생명의 관이요, 그 흔적으로서의 <배꼽>. 권시인은 시적화자를 통해 어머니 뱃속에서, '6. 25 피난길 퇴각하는 인민군 속에서 들었을 B 29 폭격소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이 가까운 나이 지나서 대중 목욕탕에서 자신의 배꼽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존재의 시원에 대한 각성과 성찰의 원생으로의 회상 등 우주적 상상력'으로, '배꼽은 은혜와 회환의 증거'라고 깨닫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머니의 '배꼽은 존재의 시원인 화자의 탄생을 회상하는 창구'가 된다 하겠다. 그리고 존재의 은총과 회한을 각성하게 하는 시편 <배꼽>과 함께 <빈방> 시편 등 여러시편에서 이러한 시적 화자의 삶의 각성의 태도가 짙게 담겨져 있다.

그렇다. 권택명 시인의 <예루살렘의 노을>은 김수복 시인의 말처럼 신앙시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시는 범우주적인 세계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시집 전반에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초월적 존재의 근원과 맥이 닿아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시인 혼다 히사시(가운데)와 소설가 세꾸지 씨 그리고 오른쪽이 권택명 시인
한국을 방문한 일본 시인 혼다 히사시(가운데)와 소설가 세꾸지 씨 그리고 오른쪽이 권택명 시인송유미

"뉴 밀레니엄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던 2001년 초에 출간한 네 번째 시집 이후 한권의 시집을 더 준비하는 동안 10년이 지났습니다. 새 천 년의 10년 동안 육신의 나이는 어김없이 50대를 거쳤지만 내 정신과 영혼의 연령은 별로 진보하지 못한 채 다시 한권의 시집을 내는 마음이 미안하고 송구합니다.

1부에는 내 시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존재와 삶의 본질에 관련되는 것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돌아보는 일상 속 자신의 모습을 성찰 한것을, 2부에는 이 역시 내 시의 변함없는 주제이자 궤적인 자연과의 교감을, 3부에는 나이 들어 새롭게 느끼게 되는 내 육신의 뿌리와 관계되는 것을, 4부에는 수년 전 노랫말을 지을 기회가 있어 실험적으로 개작하거나 써 본 서정의 세계를, 5부에는 세월이 갈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기독교 신앙의 세계와 연관되는 것들을 위주로 모아보았습니다" 라고 권택명 시인은 간단한 인터뷰에서 독자를 위한 시집 주제 및 시집 발간 소감에 대해 짧게 얘기한다.

권택명 시인의 시집 <예루살렘의 노을>을 몇 번 되새겨 읽으면서 언젠가 사진으로 본 감란산에서 찍은 모(某) 사진작가의 '예루살렘의 노을'과 권택명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얘기한 정호승 시인의 글도 문득 떠올랐다.

그의 시를 읽으면 첼로를 켜는 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우리들 마음의 집을 짓는 목수이며, 그의 시는 절대자의 가슴에 안긴 한 인간의 가난한 마음의 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는 언제나 진리의 꽃이 피어 있고, 그 꽃의 향기는 쓸쓸한 우리를 영원히 위안해 준다.

그는,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쓸쓸한 우리들 마음의 집을 지어주는 시인목수. 영원히 쓸쓸한 존재들의 위안을 위해 시를 쓰는 시성(詩聖). 거룩한 성역의 하늘을 아름답게 불태우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루살렘의 노을처럼, 권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예루살렘의 노을>은, 이순의 시인에 있어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의 순간순간을, 시로 기록한 성경이라 하겠다.

권택명 시인에 대하여
권택명 시인은 1950년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에서 출생. 영남대학교(경영학)및 동 대학원(마케팅)졸업. 한양대학교 박사과정(문화콘텐츠학)수료. 초등학교 때부터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학원문학상> 등 백일장, 문예 콩쿨 다수 입상. 1974년 박목월 시인이 창간한 월간 시지 <심상> 신인상 당선으로 데뷔. 한국시인협회 사무차장, 사무국장, 교류위원장을 거쳐 현재 심의위원. 심상시인회, 목월문학포럼, 한국기독교문인협회 각 회원. 월간 <창조문예>반년간 <빛과 숲>편집자문위원. 외환은행 도코지점에서 현재 공익자선재단인 외환은행나눔재단 상근이사. 현재 서울 서초동 사랑의 교회 장로. 시집으로 <사랑· 이후>, <소설 부근(일역, 강정중 역, 1983)>,<그림자가 있는 빈터>, <영원 그 너머로>,<첼로를 들으며>가 있으며, 한· 일 번역서로 <한국현대시3인집-구상· 김남조· 김광림>,일·한 번역서로 장편소설 <하얀 가을>, 전후문제단편소설집<제비 둥지가 있는 집의 침입자>,야마구찌 소오지 시집<하늘· 땅 ·사람> 시라이시 가즈꼬 산문집<나귀를 타고 두보 마을에 가다>가 있음.

손길 닿은 곳마다

생명들 돋아나고
회색 빛들 온통
빨강 분홍 주황 보라 노랑
그리고
순백으로 물들이는
고운 손길이기를
겨우내 기다린 여린 목숨들
쉬이 눈 뜰 수 있게
부드럽게 적시고
아픈 기억가지
연두색 싱싱한 그리움으로 바꾸는
그런 봄비이기를
<봄비>부분-권택명 

예루살렘의 노을

권택명 지음,
모아드림, 2010


#권택명 시인 #예루살렘의 노을 #어머니 #성경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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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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