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석씨에게는 '루저'와 '광고천재'라는 상반된 꼬리표가 붙어 있다. 지방대 출신이 '루저'로, 이후 뉴욕에서 활동하며 국제 광고제의 상을 휩쓴 성공신화가 '천재'라는 꼬리표가 된 것이다. 그러한 상반된 수식어에 대해 그는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연합뉴스
- 근황이 궁금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뉴욕에 있는 대학원에 다니는데,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수업 내용이 사업하고 직결되고, 사업의 결과물이 연구 주제로 쓰이고 있으니까요. 광고에 국한된 건 아니고 콘텐츠 개발쪽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 없이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P2P 스타일의 콘텐츠, 디자인 등을 국내 클라이언트와 공동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갑을 관계가 아닌 동반자 관계에서 진행하는 일입니다."
- 2006년 뉴욕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학원강사도 하고 간판 만드는 일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미술학원 강사 일은 고3 때부터 유학 가기까지 했습니다. 강사 경력이 꽤 됩니다. 간판 일은 제가 변변한 직장이 없다 보니까 주위 이웃들에게 여러가지 부탁을 해서 하다 보니 직업이 된 거였구요."
- 그런 경험이 지금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상당히 좋은 질문인데요. 저는 스티브 잡스를 존경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 가운데 '커넥티드 닷츠(connected dots)'라는 표현이 있어요. 인생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것이고, 그 점들이 모여 선이 되고 면이 된다는 얘기인데….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게 지금의 나를 만드는 밑바탕이 되고 밑거름이 됐거든요.
미술학원 강사를 하면서 추상적인 개념과 애매모호한 내용을 학생들에게 쉽게 풀어서 가르친 것도 나중에 클라이언트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상당한 도움이 됐습니다. 동네 뒷골목에서 간판을 만들었던 일도 대기업 광고 일을 통해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죠. 예를 들어 대기업 광고업체 부장쯤 된다고 하면 그런 조건에서는 광고 만들기가 쉬워요. 밑에 직원들만도 수십 명이 되니까. 그런데 정말 지지리 돈도 없이 30만 원, 50만 원의 적은 예산에 쪼들리면서 (간판 일을) 했던 게 지금 제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광고계의 전설인 데이비드 오길비도 수세미 같은 걸 파는 방문 판매원이었던 시절이 있었죠. 아파트 문 틈에 발을 집어넣고 '이거 하나 사주세요' 이렇게 외치며 처절하게 살았던 삶의 몸부림들이 결국…. 광고와 영업은 뗄 수 없는 관계거든요. 세상 모든 경험은 버릴 게 없어요. 어차피 버릴 게 없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이제석이라는 이름 뒤에는 '광고 천재'와 '루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데요. 이런 상반된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광고장이로서 천재와 루저라는 수식어를 함께 가진 것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광고를 취권에 많이 비유하거든요. 광고라는 게 너무 똑똑해 보이면 사람들이 경계하고 거리감을 느낍니다. 장삿속이다 싶으면 '속물 같은 얘기하고 있네' 하면서 거리감을 두죠. 그런데 좀 바보 같고 어리바리한 얘기를 할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호감을 갖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봤던 좋은 광고 캠페인들은 다들 바보 같으면서도 동시에 스마트한 면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광고장이는 바보스러움과 천재스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바보 같아도 광고가 안 나오고 너무 똑똑해서 머리 굵은 얘기만 해도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지요. 저는 바보와 천재가 공존한다는 평가에 대해서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재'이자 '바보'란 평가,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 한국이나 미국이나 '루저'가 존재할 텐데, 루저가 만들어지는 사회 분위기나 시스템은 어떤지 궁금합니다."글쎄요. 저도 미국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제가 '이건 이렇다'라고 명쾌하게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이 자유로운 나라라고 하지만 사실 그만큼 보수적인 나라도 없고….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사회든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만이 공평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한테 불리하게 주어진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크리에이티브의 힘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오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70, 80년대 영화만 보더라도 '야, 이러다가 언젠가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는 세상이 올지도 몰라'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부분을 오히려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역설적으로) 흑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겁니다.
제가 지방대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높이 평가하는 거 아닐까요? 제가 강남 출신에 좋은 대학 들어가서 광고대회를 휩쓸고 알아주는 광고대행사에 들어갔다면 '엄친아'라는 소리나 들었겠죠. 그러나 저한테 주어진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저는 루저라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제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아마 오바마도 (흑인이라는) 자기 환경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