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소도를 육신사 근처로 옮겨?육신사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육신사의 부속건물 숭절당에 박근혜 한나라당 전대표, 김범일 대구시장에게 "교도소 하빈 이전 반대" 의견을 밝힌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위의 사진은 별당인 충효당 입구에 내걸려있는 반대 결의문이다.
정만진
대구에는 묘골마을이 있다! 박팽년의 직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성촌인 묘골마을은 대구가 외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조선 시대의 역사유적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의 이 마을은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있다는 이유로 흔히 동명 대신 "육신사"로 불려진다.
육신사 경내에는 '六臣祠'라는 편액이 걸린 외삼문, 사육신만이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고 있는 까닭에 '六臣祠' 대신 '崇正祠'란 편액이 걸린 사당 건물, 박팽년의 손자 박비(뒷날 박일산으로 개명)가 1479년 지은 태고정(보물 554호), 7대손 숭고가 1644년 별당으로 건축한 충효당, 14대손 문현이 1664년 지은 도곡재(대구시 유형문화재 49호), 제사 때 쓰는 제기를 보관하고 임시숙소로 사용하기도 하는 숭절당, 그리고 2010년에 문을 연 사육신기념관 등이 당당한 모습으로 웅거하고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니 이런 유적은 아무리 많아도 나라 안에 여섯 곳을 넘길 수 없다. 특히 박팽년은 사육신 중 유일하게 직계 사내자손을 남긴 사람이므로 사육신의 후손이 99칸 종택을 짓고 번창하게 살았던 흔적을 대구 아닌 다른 곳에서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육신사는 대구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마을 들머리에 사육신기념관까지 설립되어 있으니 묘골마을 육신사는 자녀와 함께 꼭 찾아보아야 할 뜻깊은 역사여행지임에 틀림이 없다.
▲사육신기념관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제 어머니의 여종을 '엄마'로 아는 채로 살았던 묘골마을 입구에 있다. 2010년 건립.
정만진
<조선왕조실록> 일부- 사육신 처형과 그 유족 처리 |
세조 4권 2년 6월 7일 박팽년(朴彭年)이 이미 공초(供招)에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팽년·유성원(柳誠源)·허조(許慥)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사방으로 잡아당겨 찢어죽이는 형벌인) 거열(車裂 )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전(傳)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친자식(親子息)들은 모조리 (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인)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의 잔읍(殘邑)의 노비(奴婢)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세조 5년 2년 9월 7일 세조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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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복위를 기도하였다가 실패한 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직계 존비속 남자들은 모두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그나마 여자 가족들은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지만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직계 아들이나 손자가 죽지 않고 살아난 예외가 있으니 그가 바로 박팽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