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 "민란의 출발지점은 노 대통령이시네요."
문 : "노짱이 당일 아침 집을 나가시는 마지막 동영상 얘기 했잖아요. 그 독한 결심한 양반이 전경한테 고개 숙여 인사하시고, 마지막 집 나가면서 집 앞에 잡초 뽑고, 참…. 그 풀 뽑는 모습이 나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리고 몸을 던지시고 거기에 묻히셨는데 내가 배우를 한다는 게 무슨 지랄이냐, 한마디로 지랄이다.(그는 이 대목에서, 아버지 얘기에 이어 또한번 눈물을 글썽였다.) 노짱 퇴임하고 돌아가시기 전까진,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무대에) 복귀하려고 발버둥을 친 거죠. 예전 같으면 절대로 안 했을 영화들을 막 했어. 하자는 대로 다. 왜? 난 배우여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나를 엄청나게 발목을 잡아서 꼼짝 못하게 하는 족쇄라는 거를 깨달은 거죠. 서거 이후에. '이 양반은 돌아가시고 묻혔다. 여기. 너는 뭔데? 배우가 뭔데?' 그 생각이 든 거죠. 서거 직후엔 참여정부하셨던 분들에게 제안을 드렸는데 그게 무산돼서 그냥 손을 놓았다가 1년 지나서 생각해 보니까 '제안할 사람이 마땅히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 정파가 있으니까. 만약 나도 입각을 했었거나 출마를 했었으면, 나도 어떤 정파에 들어가 있거나 또는 내가 정파를 만들었거나, 내 성격상 어떤 정파에 속했겠지요. 그러면 이 제안을 못했겠죠. 결과적으로 참여정부 5년 동안 산만 다니고 있었던 게 무지하게 고마워진 거예요.(웃음)"
양 : "노 대통령 선거엔 어떻게 뛰어들게 됐나요?"
문 : "노사모는 명계남이 먼저 시작했지. 대선 앞두고 명계남이가 "이제 너도 같이 할 때 됐다. 들어와야 된다." 그래요. 그래서 "그러면 시작하자" 된 거죠. 그런데 그때는 제가 연설을 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죠. 근데 부산에 무슨 노 후보 행사에서 명계남이가 사회를 보면서 다짜고짜 그냥 불러 올린 거야. 연단에. 깜짝 놀라 뛰어나가면서 생각을 한 거예요. '짧게 무슨 얘기를 하나.' 내가 길게 얘기할 수 없는 거잖아요. 짧게 뭐를 얘기했는데 그게 괜찮더라고. 그 다음부터 계속….(웃음)"
양 : "2002년 대선 때 그 유명한 '노무현의 눈물'을 흘리게 한 명연설의 장본인인데, 피를 토하듯 절규했던 당시 심경은 어땠어요?"
문 : "근데 나는 그 연설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 몰랐죠. 선거 때, 나한테 계속 연설을 시켜요. 계속 했지. 내 심경과 느낌에 최선을 다했지만, 사실 그냥 한 거예요. 주요 내용은 거의 두 주 동안 계속 했던 내용이기 때문에 실제로 다 외운 거나 마찬가지고. 현장에서 들어갔던 말은 느낌이죠. 심경이었고. 그런데 노 후보는 당신의 정치생애를 주욱 반추하면서 그냥 눈물이 흘렀나 봐요.
눈물 흘리는 장면도 우연히 포착된 거야. 영상하는 친구가 내 연설만 찍고 있다가 노짱 우시는 건 알지도 못했어. 그런데 나를 찍는데 뒤가 땡기더래. 지금 노 후보는 어떤 표정일까 하고 싹 돌려보니까 노짱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거야. 그래서 눈물 주르륵 흐르는 게 잡힌 거야. 마침 그 때 <오마이뉴스>도 찍었거든. 그 장면을 생생히 잡았어요. 걔가 찍은 것과 <오마이뉴스>가 찍은 거를 같이 합하니 전체가 살아있는 거지. <오마이뉴스> 영상 없었으면, 그 다음에 한나라당에서 '그 눈물 가짜다' 'CG다' 그랬는데, 다행이었죠. 이러는 바람에 그 연설 영상이 당시까지 인터넷 사상 최대 클릭을 기록하게 됐죠."
양 : "노 대통령 당선되시고 나서 아무 덕본 것도 없이,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친노' 딱지가 붙어서 부담은 커지고 힘든 길을 걷게 됐죠?"
문 : "그렇게 됐지만 어쩌겠어요. '아, 뭘 해도 말썽이구나. 뭘 해도 씹히니까 부담이 되겠구나. 내가 언론에 안 비치는 게 낫겠다. 그게 노짱 돕는 거다.' 그래서 그냥 산으로 가버렸어요. 5년 내내 산만 다녔어요. 지금 와서는 '아, 그건 잘못 됐구나'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어찌 됐든 부담이 안 되려고 빠졌던 거죠."
양 : "아버지 문익환 목사님, 형님인 연출가 문호근 선생, 그리고 문성근. 집안의 세 사람 다 반독재 통일운동, 공연예술, 연극-영화 각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이고, 대한민국 진보운동의 상징적인 족적을 남기신 거 같아요. 어떤 저항적 DNA 같은 게 있다고 보나요?"
문 : "아무래도 가정에서의 여러 것들이 영향을 미쳤지 싶어요. 할머니가 아버지 어렸을 때 베개에 직접 태극기를 수를 놓아 그걸 베고 자게 하셨대요. 그리고 집안에서 늘 기도하시는 내용이 나라 걱정이었고. 아버지가 윤동주 시인과 함께 광명중학교 다녔는데, 어느 날 선배들이 와서 시국강연 한다고 다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졸업생들이 와서 출세하려면 일본 군관학교를 가야 된다고 주장했대요. 그때 군관학교 간 선배 동료 후배들이 5·16의 한 축으로 나오는 거예요. 출세하려고 일본 군관학교 간 애들이 5·16 주최세력으로 나왔으니. 그 전엔 아버지가 휴전협정 할 때 통역관을 했는데, 그때 남쪽 협상대표로 나간 사람이 한국말을 못 했다는 거라. 장성이 일본말만 했다는 거지. 그런 얘기를 어려서부터 계속들은 거지요. 그런 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아버지뿐 아니라 박형규 목사님, 김관석 목사님 이런 분들 보면 그 아들들이 다 감방에 갔어요.
나는 무서워서 못 가겠더라구. 인간 같지가 않아요. 아버지 하시는 게. 근데 나중에 안거지. "윤동주 죽여, 장준하 죽여, 이젠 내가 죽을 차례야, 나도 죽여라" 그러시는데 그게 무슨 협박이 되겠어. 그런 사람한테. 그런 삶을 사셨어요. 나는 그 경지가 도저히 안 되는 경지였고, 못 했던 거고.
내가 왜 노 후보 도운지 아세요. 그의 인간적인 매력, 그가 단 한 장의 필승카드였다는 것도 있지만 내 가족사도 있어요. 그 존경하는 아버지도 87년 대선에서 양김분열을 극복 못했잖아요. 나는 그 책임을 느껴요. 물론 당시 민주화 운동 진영 안에서의 절차를 밟았지만, 어찌됐든 과제를 남긴 거잖아요. 사실은 (아버지 대신)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
양 : "아버지로서의 문익환 목사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문 : "'문익꽝'이잖아요, 별명이. 굉장히 원칙주의자였고, 팍팍했고, 굉장히 단호했고, 고집 세고. 그런 분인데, 딱 결정하는 순간부턴 목숨을 던지는 거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돼 버린 건데. 엄혹한 탄압국면에서 부단히 자기를 열고,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이었고, 굉장히 단호한데, 우리한테는 완벽한 자유를 보장해 줬어요. 자식들한테는. 다 마음대로 살도록.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았고, '네가 네 인생 개척하라'고 그냥 맡겨 두셨어요."
양 :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보면, 본인은 지금 어떤 아버지인가요?"
문 : "개판이죠, 뭐.(웃음) 일종의 자기비판이 될 수 있는데, 가정을 잘 유지해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엑스와이프나 아이들에게 무지하게 미안해요. 그리고 헤어졌지만 엑스와이프나 아이들한테 아빠로 할 수 있는 거를 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최선을 다했다 라고는 생각은 하는데, 헤어진, 헤어지게 된 것, 유지 못한 것, 이것에 대해서 무지무지하게 미안하죠."
양 : "배우의 길로 접어들게 된 건 어떤 배경인가요? 서강대 졸업하고 취직해서 직장 다니다가 배우의 길엔 늦게 접어들었죠?"
문 : "처음에 시작한 건, 형들이 대학교 때 연극을 했기 때문에 '나도 대학가면 그냥 하나보다' 생각 없이 시작했던 거고. 졸업할 때는 연기자로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한 직장생활 5년쯤 지나면서 인생의 끝이 보였어요. '큰 기계의 작은 부품으로 마모돼서 결국 버려질 것이다, 이러지 말고 망하더라도 내가 결정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다가, 망해도 내가 망하자.' 이런 생각으로 거의 만용에 가까운 결정을 했어요."
양 : "지금은 배우의 길을 접은 겁니까? 아니면 한국 정치를 바꾸기 위한 일로 인해 잠시 접어두신 겁니까?"
문 : "'일단은 잠시 접는다'하고 접는 거예요. 이를테면 정치참여 이 부분은 바람직한 일이고 실제 현실정치를 해 주는 분들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해요. 사실 정치를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잘못된 거라고 보고,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응원하고 그러죠. 그런데, 이런 삶 자체가 행복해 보이진 않아요. 지금 내가 하는 일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연기하는 게 행복하고,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즐거운 게 아니기 때문에 즐겁게 정치를 할 수가 없는 거지. 대신 2002년에는 그런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직업을 안 바꾼다고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직업을 안 바꾸겠다고 미리 약속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내 자유니까. 그냥 상황을 보자, 상황을 보고 열어두는 건데…. 행복하진 않아요. 행복한 건 여전히 연기죠."
양 : "배우가 된 이후 평생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하나요?"
문 : "네. 그런데 이거 시작하면서부터 아무거나 먹어도 활동량이 많아서 체중이 늘지 않아요. 요새 삼겹살, 피자, 막 먹습니다."
양 : "먹는 걸로만 따지면 가장 행복한 시기네요."
문 : "가장 행복해. 아무것도 안 가려."
양 : "문익환 목사 아들 문성근, 노무현의 동지 문성근이 아니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까요?"
문 : "한 가정의 가장으로, 좀 막 사는 배우 하고 있겠죠."
양 : "다음 목표나 소망이 뭔가요?"
문 : "민주정부가 장기집권 하는 거예요. 이 운동이 성공하고 틀거리를 만들어 야권 단일정당을 창출하고, 2012년 선거 후에, 시민정치운동으로 남겠다는 지금 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서 전국 네트워크를 만들어보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장기집권의 길을 여는 거라고 생각해요. 장기집권이 되면, 나는 편안하게 연기하면서 노는 게 제일 좋죠."
양 : "먼 훗날, 사람들이 문성근에 대해서 평가할 때 명배우로 남기를 원합니까, 한국정치를 굉장히 의미 있게 바꾼 보람 있는 운동가로 평가받기를 원하십니까? "
문 : "'열심히 살았던 사람' 정도지."
양 : "긴 시간 진솔한 말씀 고맙습니다."
"정치는 연애... MB로 돌아선 애인에게 빌고 있다"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안 끝났습니다. 현직 기자 때 포함해서 꽤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인터뷰 요청은 제가 했는데, 그는 할 말이 남았다며 얘기를 더 하자고 했습니다. 제가 성의 없는 인터뷰어였나 싶을 만큼 미안했습니다. 평소 그는 말이 많거나 얘기를 길게 하는 스타일이 결코 아닙니다. 늘 사양하는 스타일입니다. 민란에 대해 못 다한 얘기가 남았던 겁니다. 왜 민란인지를 말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노무현 대통령 선거유세 때 보여줬던 그 열정 그대로였습니다.
문 : "요새 자꾸 '정치는 연애다' 하는 느낌이 들어요. 마음을 서로 주고받아야 돼. 마음이 열려야 서로 소통이 되고 이러는 건데. 스님들 삼천배 하는 그런 심정으로 하게 돼요. 왜 그런 생각이 드냐면,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우리 시민은 존중받고 싶다, 위로받아야 된다, 그동안 정치권이 국민을 너무 고문해왔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많은 국민들이 왜 이명박을 선택했냐? 민주정부 10년 동안 평가받을 참 좋은 일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만족시키지 못 했어요. 이유야 어찌됐든 불만족 상태에서 화도 많이 났고, 그래서 홱 돌아앉았지만 이명박 하고 연애하는 건 아니에요. 이명박이 돈을 벌게 해 주겠다, 집값을 올려주겠다고 하니까 그냥 다 찍었어요. 다 놓아 버린 거죠. 정의, 도덕, 이런 거 놓아 버렸다고.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보니까, 아주 개차반이거든. 완전히. 돈 벌게 해 준다는 것도 아니야. 그랬을 때 국민들 심리상태는 뭐겠어요. 나는 그걸 '욕망을 택했던 것에 민망함, 허망함'이라고 봐요. 그렇다고 민주 정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야. 그때는 굉장히 짜증이 났었고 그래서 돌아섰던 것이니까.
그러니까 국민들의 상태가 어떤 거냐면, 속이 다 빠져나가고 넋이 다 빠져나간 허망한 상태라는 거죠. 거기다 노 대통령은 바위에서 몸을 던졌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니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경제를 잘했다'가 15에서 60이 됐잖아요. 45%의 국민이 속았다는 걸 안거야. 그래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보는? 한 번씩, 이제 보는 거야. 다시. 미안한 부분도 있어요. 노무현에 대해서. 그렇게 욕했던 게. 그래서 6·2선거에서 그렇게 표현해 준거죠. 근데 아직 옛날처럼 돌아앉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실망했었고 화가 났던 게 다 풀린 게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조금 미안한 건 있어. 그러나 '너희들 잘못했어. 왜 나를 실망시켰냐' 이거거든요.
지금 민주진영은 뭐를 해야 되겠어요. 국민들이 정치인에게 다가와서 "미안해, 내가 오해 했어" 이렇게 얘기할 리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이 다가가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잘 할 게요." 이 얘기를 해야 되거든요. 돌아선 애인, 연인이에요. 그런데 속이 빠져나가고 넋이 다 빠져나간 사람한테 가서 "야, 이런 게 낫지 않냐? 야, 민주정부 10년 동안 소득을 이렇게 높였어. 4.5% 성장했어. 이명박은 3.2%잖아. 우리가 더 잘 했잖아."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들어요. 이걸 채워드려야 돼. 허망함을. 그러려면 우리가 믿음직한 상대가 되어야 해요. 믿음직한 상대가 된다는 거는, 정책적으로 다시 반성하는 부분도 있지만, 자세가 달라야 돼요. 그 자세의 핵심이 뭐냐. 한나라당을 보자 이거야. 쟤네들은 사찰을 해도 안 깨져요. 집권하니까 4대 권력기관을 휘둘러서 개차반을 만들어요. 조중동, 뉴라이트, 다 뭉쳐서 완벽한 철옹성 동맹구조를 만들고 있어요.
민주정부 10년 돌아보자 이거야. 갈기갈기 찢겨진 거야. 이렇게 갈라진 상태에서 우리가 국민들에게 "우리, 잘 할 게요?" "뭘 어떻게 잘할 건데?" "정책이요." "너희들부터 봐. 너희들이 하는 얘기를 어떻게 믿으라고. 또 지지고 볶을 거지? 쟤네들 봐. 쟤네들 저렇게 똘똘 뭉쳐 하는데 너희들 어떻게 믿어. 어떻게 믿고 마음을 다시 열란 말이야." 이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정말 잘 할게요" 라고 빌어야 돼. 거리에 나가서 빌어야 돼. 빌면서 "우리가 달라질 겁니다." "뭐가 달라질 건데?" "뭉칠 게요. 믿음직한 상대가 돼 드릴 게요" 그걸 하자 이거야, 지금. 민란을 통해서."
열변이 길어지면서 그는 시간에 쫓겼습니다. 국밥 한 그릇 대충 먹고 행사장으로 내달리는 그를 뒷모습으로 배웅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리 바쁘게, 살얼음의 거리로 서둘러 내달리게 할까요. 그는 오랜 기간, 매 시대, 모든 무대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이든, 다른 사람의 조연이든. 그런데 오랜 기간, 우리는 가장 시대에 정직했던 명배우를 너무 혼자 있게 한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이제 그가 인생을 걸고 가슴으로 쓴 대사에 모두가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할 이유입니다.
*인터뷰 전문은 <양정철닷컴>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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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청와대에서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 국내언론비서관 역임. <노무현재단> 초대 사무처장. 현재 <양정철닷컴> 대표 및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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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게 해준다던 MB정권, 2년만에 '개차반' 내 소원은 100만명 모아 민주정부 장기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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