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공산성 자리임진왜란 때 대구의 의병들은 주로 팔공산 공산성에서 활동을 했다. 공산성 주봉인 비로봉 정상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군사보호시설로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려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나제나 팔공산 일대는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던 것이다.
정만진
대구는 왜군의 주력 부대가 북상을 할 때나 남으로 물러갈 때나 항상 지나가는 진군로였다. 명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지만 대구는 곡창 지대인 전라도와 통하는 지역이므로 군량을 준비하기에도 좋았다. 외국 군대가 번갈아 지나다녔다는 것은 결국 대구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대구직할시가 1982년에 펴낸 <대구의 향기>는 '왜란 초에 벌써 왜적의 후방 기지로 되었으니까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이듬해 5월 왜군이 남으로 물러간 후에는 명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명군으로부터 입는 피해가 막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다. 왜군의 침공을 받은 대구부사 윤현(尹睍)이 공산성으로 물러났을 때 서사원은 거기 모여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왜군의 주력부대가 통과하고 또 후방부대가 주둔하는 곳이 바로 대구인 관계로 우리 의병이 거리낌없이 활약하기에는 무척 어려웠으므로, 당시 대구 지방의 의병 활동은 주로 팔공산 주봉의 공산성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서사원 의병장은 곡식 300섬을 청도의 오례산성에 보내어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의병들을 돕기도 했다.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이강(伊江)서원에서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