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변기 위의 어머니, 똥이 나오는 순간 손으로 그것을 끄집어내는 탓에 손에 두툼한 장갑을 끼우고, 상체는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보자기로 묶어야 했다
김수복
기저귀를 대체할 방법으로 고안한 책읽기 오늘은 사씨남정기를 읽었다. 어제는 배비장전을 읽었고, 그제는 장화홍련전을 읽었다. 그 이전에도 몇 종류 고전 읽기를 거쳐왔고, 앞으로도 많은 고전들을 거치게 될 것이다. 언제인가 한 번은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수중에 돈 몇푼 있을 때 덜컥 사놓기만 하고 아직까지 한두 번 대충 훑어보기나 했을까, 제대로 된 독서는 감히 엄두도 못낸 채로 방치되어 있던 책들이다.
먼지만 쌓이다가 결국 어느 도서관에 기증이나 되려나 싶었던 그 케케묵은 고전들을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는 이 혹독한 계절에 펼쳐놓고 한 자, 한 자, 마치 천자문이라도 외우듯이 정성을 다해 읽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줄이야, 오, 정말이지 이것은 꿈에서도 암시를 받지 못한 행운이다. 아니다. 어머니가 내게 주시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이 행복한 선물을 얻기까지의 난감한 고군부투도 사실은 기록해둘 만하다.
기저귀, 오 그놈의 기저귀를 생각하면 상기도 내 볼이 뜨겁다.(관련기사
'새를 반가워하시는 어머니 이유는?') 골치 아픈 쓰레기 신세가 예정된 대용량 기저귀를 겁도 없이 두 상자나 덜컥 사놓고 당해야 했던 물리적인 폭력(?)과 정신적인 충격을 필설로 헤아린다는 것은 곧 '나는 바보 멍텅구리랍니다"하고 자백하는 꼴이어서 썩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것인가.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 그대로 진술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의 진화를 촉진한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아버렸는데 어찌 숨기려 하겠는가 말이다.
내 돈 주고 내가 산 기저귀가 나에게 가한 물리적인 폭력을 헤아리기로 하자면 수도 없지만 그 중에 대표로 하나만을 선발하자면 역시 쓰레기 문제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기로 악명 높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가끔 찾아오는 누이나 제수씨들이 무심코 만들어낸 음식물 쓰레기를 놓고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걸 어떻게 해요?"하고 물어볼 정도로 나는 쓰레기의 처리 문제가 아니라 생산하는 것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하루에도 다서여섯 장씩의 기저귀 쓰레기를 생산하고 보니 그 체감지수는 다서여섯 장 정도가 아니라 다서여섯 트럭분이나 되는 것처럼 엄청나게 느껴지는 거였다.
땅에 묻자 하니 봄이면 내 손으로 흙을 일궈서 고추도 심고 가지도 심고 각종 채소며 화초들을 심어야 할 자리들 뿐이었다. 기저귀 한 장을 분해해서 요리조리 살펴보니 3-4년 내에 흙과 동화될 것 같지도 않았다. 궁리 끝에 말려서 태우기로 하고 연탄난로 주변에 철사로 빨래줄 같은 것을 설치해서 널어놓았다. 그랬더니 오줌이 증발하면서 발생하는 암모니아 가스가 온 집안을 뒤집어놓았다.
어매 뜨거라, 하고 기저귀를 죄다 걷어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마당의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널어놓고 말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것은 또 무엇이냐. 마을 사람들이 농사철에는 개를 묶어놓고 겨울에는 풀어놓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 뭐 어쩐다는 식으로 아무런 먹을 것도 없는 기저귀를 개들이 무슨 후각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너도나도 몰려들어 싸우고 짖어대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서로 하나씩 기저귀를 입에 물고 으르렁거리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편 먹을 것을 찾느라 부산을 떨어보지만 도대체 기저귀 안에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 이리 찢고 저리 찢고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겨진 기저귀 조각들만 마당 그득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기저귀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똥의 경우 기저귀 안에 그것이 머물러 있으면 손으로 꺼내서 마치 동지 팥죽을 쑬 때 새알심을 빚듯이 동글동글 말아서 이불 속에 감추는 새로운 작업을 개발해서 시행하고 있기도 했다. 당신 딴에는 아들이 똥을 치우느라 고생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수고를 하시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기저귀로 어머니의 용변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들에 치여 내가 그만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마침내, 책 읽기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똥과 오줌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뜸 고전 읽기를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진화한다, 끝없이 진화한다처음에는 답답한 마음에 그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어머니를 불끈 들어서 안아다가 이동식 변기에 앉혀놓고 무슨 주술이라도 걸듯이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해봐요. 자, 똥아, 똥아 얼른 나와라, 해봐요.""똥아 똥아 얼른 나와라.""아아, 좋아요, 잘 했어요. 한 번 더."어깨를 토닥거리며, 목소리에 한껏 명랑을 실어서 한 번 더, 한 번 더, 가끔은 쓸데없이 웃어대기도 하고, 나 자신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수다를 떨기도 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응원을 하다 보면 3-4월 이른 봄철 산골짜기 으슥한 기슭에서 얼음이 녹아 흐르듯이 졸졸, 졸졸 그렇게 어머니의 몸에서 노폐물이 빠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리면 어찌나 반가운지, 어찌나 기특하고 대견하고 뿌듯하고 하여튼 뭔가 만사형통이라도 이루어진 듯한 느낌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겨졌다. 그렇게 살짝 눈을 감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오줌 소리는 홀연 오줌으로서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다른 무엇이 된다. 작은 시냇가의 맑은 물소리 같기도 하고, 멀리 산사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 같기도 해서 나 자신이 뭔가 깔끔하게 정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 깔끔한(?) 놀이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문득 내가 지금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의 꼬리를 물고 다른 한 생각이 번갯불처럼 휙 지나갔다. 어머니를 변기에 앉혀놓고 어서 똥을 누라고, 어서 오줌을 누라고 재촉하는 형식의 재롱이나 떨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만했다.
처음에는 어린 조카들이 놀러왔을 때 펼쳐볼 수 있도록 비치해둔 동화책이며 만화책 같은 것들을 큰소리로 읽어보았다. 그런데 동화든 만화든 현대물은 어머니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채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얼른 자러 가야 한다"고, "보듬아다가 이불 위에 눕혀달라"고 보채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거였다. 하여 이번에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영화는 이게 아무래도 맹점이 있었다. 딴에는 어머니의 변기 옆에 의자를 놓고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본다고 보지만, 보다 보면 내 자신이 영화에 몰입되어 어머니가 영화를 보는지 안 보는지 나몰라라 하는 형국이 되어 버리고, 그러면 어머니는 다시 소외감을 느끼고 자러 가야 한다고 보채다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최악의 경우 앞으로 굴러 떨어지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야아 이것 참, 뭔가 신통한 방법이 있으면서도 그게 잘 안 잡히네에?"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어느 순간 머언 먼 옛날의 한 풍경이 떠올랐다. 장터의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할아버지가 파는 이야기책들, 요즘으로 치자면 시집 한 권의 두께나 됨직한, 빨갛고 파랗고 노란 원색의 사람 그림이 표지에 인쇄되어 있을 뿐 책 안에는 단 한 컷의 이미지도 없이 세로쓰기의 글자들만 빽빽하게 들어찬 <콩쥐팥쥐>니 <장끼전>이니 하는 이야기책을 내 나이 여섯이던가 일곱이던가 그런 시절에 어머니는 참 많이도 읽어주셨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국문학을 공부하지도 않은 내가 고전들을 사 놓았던 이유도 아마 어린 시절의 그런 추억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어쨌든 어린 시절의 그런 풍경이 떠오르는 순간 내 입에서 "이거다, 이거야, 바로 이거였어" 소리가 절로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