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필리핀 바클로드 시내 모습
이명주
각기 다른 여운을 남긴 두 만남이 있었다. 하나는 '진정한 크리스천'과의 그것. 어학원 내 유일한 미국인 여자 튜터(tutor)와 저녁식사를 했다. 풍만한 체구에 정이 많은, 예순이 넘은 여인이다. 작년 가을쯤 아흔 넘은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미국에 두 딸이 있지만 계속 이곳에 살 거라 한다.
어학원에서 평소 5분 거리 레스토랑에 가는 데 약 한 시간, 주문하는 데 30여 분. 생각보다 늦은 식사였다. 무척 꼼꼼하게, 그래서 약간의 인내심을 요했던 그녀의 메뉴 선택은 어쨌거나 탁월했다. 프랑스식 양파 스프에 타일랜드 해물 커리, 그녀 몫의 인디언식 커리, 차가운 과일 쥬스의 궁합이 적절했다.
발음 수정을 겸해 다양한 대화가 오가던 중 종교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크리스천이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모든 신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이는 인간 부류들을 혐오한다"고도 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말로 해봐야 소용이 없다. 동시에 말로는 불교신자고 무슬림교도라거나 무신론자라 할 지라도 그 삶이 크리스천다우면 하나님 눈엔 크리스천으로 보일 것이다."또 다른 만남은 'Honor(명예·체면)'에 관해 생각케 했다. 절대 비밀로 해줄 것을 부탁하며 얼마의 돈을 빌려간 외국인이다. 늦은 오후 어학원 내 카페테리아 앞을 지나는데 그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평소에 무척 상냥했던지라 무슨 일이 있냐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며 "아주 심각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잠시 후 급기야 눈물까지 훔쳤다. 가까운 지인이 돌아가셨거나 사고를 당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려준 '심각한 일'이란 약속한 돈을 제날짜에 받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약속은 신뢰의 문제이며, 자신의 "Honor"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심 그것이 저리도 한숨 쉬며 울 일일까 싶었다. 곁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푸념을 늘어놔서 대체 얼마가 필요하냐 물으니 2500페소(한화 6만 3천여 원)라고 했다.
다소 의뭉스러웠지만 소속이 분명하고,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오죽했으면 싶어 본인 돈을 빌려줬다. 처음엔 그럴 수 없다고 (딱 한번)거절했지만 이내 "정말 고맙다"며 수락 의사를 밝혔다.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그리고 서너 번인가 더 자신의 "Honor"를 역설했다.
자취가 길었고 수년간 회사생활도 했기에 일면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녀 말들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돈을 받자마자 눈물 가신 얼굴로 새 담배부터 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명예나 체면 같은 단어들은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참고로 삼 일 후에 돈을 갚겠다던 그녀는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