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유성호
'오장풍' 사건을 계기로 곽노현 서울교육감이 체벌 금지를 선언한 이후, 체벌 논란은 2011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교과부(장관 이주호)가 간접 체벌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발표했고, 임혜경 부산교육감은 12일 자율적 체벌 허용을 전격 발표했다. 교총과 같은 보수적 단체들과 조중동 등 보수 언론도 교실 붕괴니 교권 침해니 하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체벌 금지를 비판하고 있다.
학생 인권 보장이라는 대원칙은 찬성하면서도 '시기상조', '준비부족', '교육적 효율성' 등 현실적인 이유로 체벌 허용을 주장하는 현 상황은 마치 미국의 흑백 분리학교(흑인과 백인이 각각 다른 학교에 다니게 하던 것) 폐지를 둘러싼 대립과 비슷해 보인다.
미국의 흑백분리 학교가 어떻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를 '리틀록 나인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 교훈을 한번 생각해 보자.
노예제 폐지 후에도 흑백 분리 학교 정당화한 플레시 판결링컨 대통령의 노예제 폐지 선언 이후 1865년 미국 수정헌법 제13조에 노예제 폐지가 명시된다. 이후 1868년과 1870년 각각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에 흑백 평등조항과 흑인의 투표권 보장이 명문화되면서 외견상 미국의 인종차별은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현실에서 흑인 차별은 계속됐으며 '흑백 분리 학교'가 일반적인 학교 형태였다.
그러던 중 1896년 구두 수선공인 호머 플레시(Homer Plessy)라는 흑인 혼혈인이 기차의 백인 전용칸에 올라타는 사건으로부터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Plessy Vs. Ferguson)'이 시작된다. 철도 안내원의 유색인종 칸으로 옮겨 타라는 요구를 거부한 플레시는 '인종 격리 차량법(The Separate Car Act)'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그는 이 법이 흑백 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14조에 반하는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지방판사 퍼거슨(Ferguson)과 대립했다. 결국 연방대법원은 "인종의 피부 색깔로 기차 좌석을 나눈 것은 잘못이지만, 나눠놓은 시설이 양쪽 모두 같으면 괜찮다"는 이유로 위헌이 아니(합헌)라고 판결했다.
1954년 브라운(Brown) 판결로 바뀔 때까지 유지된 '분리하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원칙은 흑백 분리의 대전제가 됐다. 이 원칙에 의해 흑인들은 버스를 탈 때에도 백인 전용석에 앉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가 따로 있는 것이 합법이었고, 흑인의 출입을 금하는 식당도 있었다.
브라운 판결 '
흑백 분리 학교는 태생부터 불평등하다' 선언
당시 대부분의 주에서 흑백 분리 학교가 허용되는 가운데 보수적인 남부 텍사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미주리 등에서는 흑인과 백인 어린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주정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이 합헌이라고 했던 흑백 분리 학교도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성(父性)에 의해 60년도 못 가 뒤집어졌다.
1951년 캔자스 주 토피카(Topeka)에 살던 흑인 올리버 브라운(Oliver Brown)은 8살 딸 린다(Linda)가 가까이 있는 백인학교를 두고 다섯 블록이나 떨어진 흑인학교를 다니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철도를 건너야 해서 딸의 안전과 건강을 걱정한 아버지는 가까운 학교에 다니게 해 달라고 재판을 청구했다. 그 유명한 브라운 판결(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 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이 시작된 것이다.
담당 변호사는 아이의 안전과 건강뿐 아니라 흑백 분리 학교가 흑인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충격을 주며 그 정신적 충격은 법의 제재보다 더 크다고 주장했다. 1951년 첫 청원이 거절 당했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재판을 계속했다. 드디어 1954년 연방대법원은 플레시 판결을 뒤엎고 만장일치로 "'분리하지만 평등하다'는 논리는 공교육 분야에서 설 자리가 없다. 분리한 교육 시설은 태생부터 불평등하다"라는 판결을 했다. 위대한 부모의 자식 사랑이 가져온 역사적 판결이었다.
이 브라운 판결로 미국에서 흑백 분리 학교는 없어졌을까? "모든 학교에서 흑백분리를 철폐하라. 즉, 흑백 분리 학교를 폐지하라"는 대법원의 명령에 남부의 대부분 주들은 격하게 반발했다. 3000개가 넘는 교육구 중에서 700개도 안 되는 곳만 분리 학교를 없애고 통합 학교 정책을 추진했다. 학교뿐 아니라 남부의 전문직과 기업인들은 백인시민위원회를 조직해 대법원의 판결을 거부하고, 흑인의 은행 대출을 금지하고 직장에서 쫒아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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