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노수복 할머니와 함께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왼쪽)와 노수복 할머니, 함께 돌보는 조카들(오른쪽 여성 둘), 그리고 푸켓한인회 이한주 씨(뒷줄)
윤미향
정대협 일행이 방문했을 때 할머니는 때마침 태국에 비가 많이 와서 집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조카의 집으로 옮겨 지내고 있었다.
할머니께 고향소식으로 드리려고 갖고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활동사진첩, 유자차, 김, 한과, 전통부채, 홍삼제품 등을 할머니앞에 풀어놓으니 할머니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어났다. 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을 볼 때는 슬픈 듯, 반가운 듯한 표정들을 표해내기도 했다.
병원비로 진 빚을 갚으라며 성금을 건네니 할머니는 "뭘 이런 걸 주느냐"며 받지 않으려 하였다. 고향사람들의 마음이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드리니 받아들고는 이제 병원빚은 다 갚게 되었다며 아주 좋아하셨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사느라 한국말은 알아듣기도 힘들어 했고, 더군다나 한국말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수복 할머니는 자신이 살았던 곳이 안동시 삼동면 안심리라고 우리말로 표현했고, 아버지, 동생들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고향을 그리는 듯, 지난 아픈 역사의 상처를 호소하는 듯 '아리랑' 노래를 토해내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오래간만에 고국의 냄새를 느껴서일까? 자청해서 도라지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더니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숨이 차는지 더이상 노래를 잊지 못하였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고향만큼은, 아리랑 노래만큼은 잊어버릴 수 없었던 할머니의 삶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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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수복할머니의 아리랑 한국말은 다 잊었어도 잊을 수 없었던 아리랑 노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노수복이 부르는 아리랑 노래에는 그녀의 눈물겨운 삶이 서려있다. ⓒ 윤미향
할머니는 생일이 언제인지 몰라 해방되던 8월 15을 생일로 기념하고 있었다.
올해 2011년 생일에 할머니를 초청하겠다고 말씀드리니 혼자서는 못 온다고 하신다. 그래서 조카님과 함께 모시겠다고 하니 그러겠다며, 선물로 드린 홍삼도 열심히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건강관리를 잘하겠다고 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소리를 질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통역자가 중간에서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가슴따뜻하고, 할머니 얼굴에 핀 웃음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할머니께 보청기도 보내드리고, 홍삼도 계속 끊기지 않게 보내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왔다. 간병인을 쓸 수 있도록 지원방안도 만들어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올해 아흔 두 번째 생신은 할머니가 그리워 하는 부산 영도다리도 모셔가고, 안동 고향에도 모셔가며 한국에서 생일잔치를 해드리겠다고도 약속했다.
많은 약속을 했지만 지난 90평생 힘들게 살아온 노수복 할머니의 고난의 삶에 조금이나마 함께하는 방법은 이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따뜻한 생일잔치를 준비해야겠다. 생일잔치에 함께 참여할 가족이 될 사람들도 모아야겠다.
'노수복 할머니를 고향에 초대하는 사람들 모임'에 함께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의 손길이 많아지길 기대해본다. (노수복 할머니 후원 문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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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노수복 할머니가 부르는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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