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
지난 해 말, 일본 오사카지검 특수부 주임검사가 후생노동성 공무원을 기소하면서 검찰 기소 내용에 들어맞게 압수품인 플로피 디스크의 갱신 날짜를 고친 것으로 드러난 뒤 현직 검사 3명이 징계면직과 함께 구속 기소된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이후 오사카지검 검사장과 차석검사 등 고위간부 3명이 물러난 데 이어 검찰 총수까지 사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일개 공무원이 아니라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한 조작입니다. 검찰총장 정도가 옷 벗고 끝날 일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4대강 파헤치기' '대포폰 민간인사찰' '형님-안주인 예산 날치기처리' 등으로 내공을 다져 온 정권이어서 이번 일로 붕괴되는 일까지 벌어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법무장관 사퇴, 대통령 사과까지는 있어야 할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온갖 기막힌 일들을 벌이면서도 유난히 국격을 따지며 정상적인 척하는 정권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닷새나 지난 오늘까지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못쓰게 된 것은, 또 다시 언론 때문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데 이 후안무치한 정권이 먼저 움직일 이유가 없습니다. 수구언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끼고 믿는 이른바 진보언론들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번 사건으로 깊이 깨닫게 됐습니다.
3차 공판을 다룬 종이신문과 인터넷 신문들을 주의 깊게 지켜봤습니다. 물론 모모하는 수구족벌 신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송은 듣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내가 신뢰하는 2개의 종이신문과 2개의 인터넷 신문 중에서 3차 공판을 보도하는 데 있어 검찰의 조서 조작을 문제 삼은 신문은 없었습니다. 한 신문과 한 인터넷 신문은 전날 저녁 늦게 기사를 마감한 후 다음날 새벽 2시에 벌어진 그 결정적인 상황에 대한 후속기사가 전혀 없었고 다른 두 매체 역시, 새벽상황에 대한 추가 보도는 했으되 시선을 전혀 다른 데 두고 있었습니다.
이날 공판이 휴정시간 포함 12시간을 넘긴 것이 사실이고 그중 11시간 이상을 검찰 쪽이 한 사장의 검찰에서의 진술이 법정에서 번복한 진술보다 더 신빙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집요하게 그를 신문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날 공판의 핵심은 '12시간 걸린 사상초유의 새벽재판'이거나 '검찰 추가증거 공개 놓고 공방 치열'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이날의 핵심은 12시간의 마지막 10분에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검찰의 한명숙 총리사건 조작의혹'입니다. 그것이 30년 가까이 현장에서 뛴 선배 기자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은 왜 한결같이 나와 다른 시각을 가졌던 것일까요.
검찰 프레임에 갇힌 기자들... 보도 한줄 없었다이날 재판이 끝난 새벽 두 시 넘어서까지 법정에는 10명이 넘는 젊은 남녀 기자들이 자리를 지켰는데 그중에는 진보매체의 기자도 두세 명은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날 따라 평소보다 많은 기자들이 취재에 나섰고 그중 꽤 많은 기자들이 마지막까지 남았던 것은 아마도 검찰이 "뭔가 있다"고 사전 언질을 준 영향이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무엇'에 대한 프레임이 워낙 강력하게 기자들에게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요. 즉 '검찰의 사건조작 가능성'이 비록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정해준 프레임, 즉 이날만은 '한 총리를 꼼짝 못하게 할 결정적 증거'를 중심으로 공판진행상황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자기최면에 걸려 그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거지요.
또 이른바 '조중동 프레임'도 생각해 봤습니다. 조중동이 건드리지 않는 문제는 먼저 건드릴 용기를 쉽게 내지 못하고, 고작 조중동이 설정한 범위 내에서 그들과 다른 소리 내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자족하는 협량이 이번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권력과 권위 앞에만 서면 사정없이 쫄아드는 무의식적 열패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검찰이라는 막강한 조직을 의심해야 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 또는 문제제기 후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후과에 대한 걱정이 진실을 애써 외면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 심리적 상태가 되면 지레 겁을 먹고 싸움을 피하게 되지요.
어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 진보언론인이 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고 말합디다. 구태여 어떤 진보적 시각을 갖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언론인이라면 지켜야 할 만국공통의 코드, 즉 정확성과 객관성, 균형성,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공정성만 꽉 움켜쥐고 있으면 얼마든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겠습니다. 조중동을 비롯, 수구신문들과 권력에 장악된 방송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행태가 얼마나 타락해 있는가를 또한 역설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