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헬싱키에서 지하철이나 전차(트램)를 탈 일이 있다면 검표 시스템이 상당히 느슨하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쩌다가 '나 검표원이오'라고 알리는 듯한 복장을 한 사람이 차량 안을 돌아다니긴 하지만 말이다. 약간의 요령을 터득한다면 무임승차도 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재수가 없으면 벌금을 엄청나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벌금이 아니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자칫 신용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고의로 부정을 저지르거나 사기를 치는 행위를 아주 싫어해서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이렇게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투명성이 그 사회의 기본 작동 원리로 정착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감시 및 질서 유지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엄청나게 절감할 수 있다.
지난 달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취재팀은 코디 곽수현씨(핀란드 거주)의 자동차를 이용해 이동했다. 핀란드인과 결혼해 9년째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곽씨는 길에 자동차를 주차할 때마다 대충 주차하는 법이 없었다. 혹 있을지 모르는 주차위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항상 주차 영수증을 끊어서 움직였다. 잠시 자리를 비울 경우 아무렇게나 길에 주차하는 풍경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풍경이었다.
핀란드에 처음 도착해서 마주했던 운전 기사들의 표정과 행동은 나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커피나 시끄러운 음악으로 피곤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의 운전 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에게서는 직업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감 그리고 여유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장거리 고속버스 기사들은 손님들이 아주 작은 정류장에 하차할 때에도 따라 내려서 일일이 큰 짐가방을 꺼내 줄 정도로 친절한 편이다. 식당의 종업원을 비롯한 다른 서비스 업종 종사 노동자들 역시 손님에게 굽신거리는 법이 없다.
물론, 그런 태도는 과중한 노동 강도와 열악한 처우에서 비롯되는 불친절과는 성격이 다르다. 핀란드 사람들 자체가 감정을 표정으로 쉽게 드러내는 성향이 아닌 데다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절대 지나친 감정 노동 서비스를 손님에게 베풀 것을 강요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교 근처 공사장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들이 학생 식당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대학생들 속에 섞여 식사하는 모습을 가끔 보는데, 그 모습 또한 전혀 어색함 없이 당당하다. 식당의 계산원들은 학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어도 계산에 앞서 손님들에게 일일이 '헤이'라고 인사를 건넬 정도로 이들의 노동에서는 여유가 묻어난다. 소비자의 권리 못지않게 노동자의 권리도 중요하며 육체노동 또한 존중받는 곳, 그래서 육체노동자들의 인건비가 비싸고, 고등학생들 모두가 기를 쓰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
한 중국인 친구가 내게 말했다. 핀란드 남자들은 얼굴에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너무 수줍음이 많고, 말수도 적고 게다가 더치 페이까지 하니 정이나 매력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비록 사석에선 쪼잔하게 더치 페이를 할지언정 사회 구성원 모두가 최소한의 사회 안전 장치 속에서 보호 받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험 부담을 세금이라는 형태로 서로가 나눠갖고 있는 이 핀란드 사람들이 과연 개인주의적이며 동양 문화에서 미덕이라고 일컫는 '정'이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내 이웃의 삶이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이런 연대의식을 납세를 통한 공공 복지 강화와 같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가족, 친척, 친구들 경조사를 꼬박 꼬박 챙기며 부조금을 내미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정' 의 기준이 아닐까.'
"세금 선순환 구조가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만난, 그리고 내가 1년 넘게 이곳에 지내면서 알게 된 핀란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도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세금을 기꺼이 낼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수입의 50%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는 고소득자 역시 불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스템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며 쿨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낸 세금이 쓸데없는 토목공사에 들어가지 않고, 교육과 의료를 무상으로 해결해 주고, 10대 후반에 독립할 수 있는 학생수당이 통장으로 들어오는 걸 경험한 이들에게 세금은 가장 중요한 '약속'인 셈이다. 그래서 탈세하는 사람을 살인범 못지않은 파렴치범으로 취급한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핀란드에 살고 있는 교민 신선아씨는 "우리나라는 세금을 내면 뭔가 빼앗기는 느낌인데, 여기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면서 "세금 선순환 구조가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핀란드도 사람 사는 동네이긴 마찬가지여서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공교육 선진국으로 불리는 이 곳에서도 시장 논리로 교육 정책을 입안하려는 움직임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핀란드 정책 입안자들이 특히 대학교육 분야에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강력하게 권고하는 교육 시장화 모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핀란드 학자들의 우려 섞인 연구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다만, 교육의 상품화, 수월성 교육 혹은 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아직은 소수라는 것이 중론이다. 기자 역시 핀란드 교육을 너무 미화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핀란드 교육이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집이 가난한 학생, 부진 학생 단 한 명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그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다.
또한, 길고 추운 겨울 날씨를 닮아서인지 낯선 사람만 보면 시선을 피해 버리는 이네들의 '얼음 공주' 같은 표정과 다소 은둔하려는 성향이 있는 이들의 생활방식은, 남에게 관심 많고 시끌벅적한 남쪽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5개월 정도로 상당히 길게 이어지는 추위와 동지를 기준으로 급격하게 길어지는 밤도 적응을 어렵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핀란드 사회의 '신뢰'와 투명성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 호기심 어린 관찰자의 시선으로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유학생인 필자가 갖고 있는 목표 중 하나이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서 한국 사회의 심각한 악순환 구조를 선순환 구조로 바꾸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핀란드편을 취재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핀란드 친구들과 현지 학교와 기관 관계자들, 현지에서 취재를 도와준 코디 곽수현씨, 취재팀에게 여러가지로 조언을 주신 교민 신선아씨 부부와 장원철씨 부부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핀란드편' 특별취재팀 : 박수원 기자(팀장), 임정훈 시민기자, 윤정현 해외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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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중입니다. 딸들의 나라, 공교육의 천국이라고 하는 핀란드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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