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영선못의 풍경최계복 선생의 사진작품집 표지. 이 당시만 해도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할 정도로 큰 호수들이 대구 시내 곳곳에 있었다.
정만진
지금부터 대략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구에는 큰 호수들이 곳곳에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경북대학교 북문 너머에 있던 배자못이다. 그런데 아파트를 짓는다고 메워버렸다. 배자못이 운명하기 직전까지 감삼동에도 큰 호수가 있었고, 명덕로터리 인근에는 영선못도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사진 하면 대구의 최계복이고 회령의 정도선"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만큼 유명했던 사진작가 최계선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진집이 2009년 10월 28일 발간되었는데, 표지가 바로 그의 최초 작품인 <영선못의 봄>이다. 1933년작인 <영선못의 봄>을 보면 잘 차려입은 여인네들과 중절모에 양복으로 성장을 한 신사들이 유람선에 올라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만큼 영선못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좀 더 옛날에는 서문시장도 커다란 호수였다.
본래 늪이었던 곳이 메워져 장터로 변한 서문시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지금의 대구광역시 교육청)가 1988년 12월 30일에 발행한 <우리 고장 대구- 지명 유래> 72-73쪽을 읽어볼 만하다. '대구에서 시장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약령시(藥令市)이고, 그 다음은 대구 읍(邑)장이라는 서문시장이다. (중략) 지금부터 60년 전(1928년) 12월 9일에 시장의 서남쪽에 있던 늪을 메우고, 시장을 그 곳으로 이전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문시장이다. (중략) 서문 시장 일대가 낮아서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차는 이유는 이 곳이 옛날 지금의 신천이 흐르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늪을 메워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문시장이 지금부터 80년 전만 해도 늪이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더욱 놀라운 것은 아주 아득한 옛날의 대구는 땅이 아니라 아예 덩어리째로 거대한 호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곳곳에 남아 있는 공룡 발자국과 연흔, 건열 화석지들이 잘 증언해준다. 옛날에 바다나 호숫가였던 곳에 남아 있는 건열 화석(물기가 없어지면서 돌이나 흙 위에 희끗희끗하게 생긴 다각형의 무늬)과 연흔 화석(물결 무늬)이 대구광역시 앞산 고산골 입구에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과, 고산골 입구만이 아니라 욱수천의 바위, 신천 등 곳곳에서 공룡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발견되는 것이 바로 대구가 옛날에는 거대한 호수였다는 사실의 근거이다. 물을 마시러 공룡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니던 엄청난 호수였던 대구가 기나긴 세월을 보내면서 점차 흙으로 메워져 이윽고 우리가 지금처럼 살게 되었으니,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생생한 사례가 바로 여기 대구인 것이다. 토론토의 온타리오 호수는 예나지금이나 그대로 호수로 남아 있지만, 바다나 마찬가지였던 대구는 온통 땅으로 변했고, 그나마 곳곳에 남아 있던 중간 크기의 호수들도 인간에 의해 메워져 버렸으니 그 좋은 경관은 이제 어디 가서 다시 볼 수 있을는지, 그저 안타까울 뿐.
대구광역시 앞산 고산골 입구의 <공룡 발자국, 연흔, 건열 화석지> 안내판 |
건열(Mud crack) : 이토(泥土), 점토(粘土), silt(모래보다 잘지만 진흙보다 굵은 입자)로 된 지층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수축하여 다각형의 무늬 모양을 보이는 것으로 석호, 호소 주변, 해안가에서 볼 수 있다.
연흔(Ripple mark) : 지층 표면의 물결 모양으로서, 지층의 퇴적 당시에 형성되거나 해안, 하천 바닥의 모래땅 표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바람, 유수(流水), 파랑(波浪)의 작용으로 형성되며, 비대칭적인 수㎝〜 10여㎝에서 대칭적인 10㎝〜 수m의 물결 모양을 나타낸다.
조각류(Ornithopoda) : 2족 보행을 하는 초식 공룡으로 뾰족한 부리와 많은 수의 이빨을 지녔다. 육지나 물가에 살면서 대부분 두 발로 걸었으나, 간혹 네 발을 사용하여 걷는 종류도 있었다. 이구아노돈, 하드로사우루스, 드리오사우루스 등이 있다.
용각류(Sauropoda) : 쥬라기에서 백악기에 번성한 공룡 무리로 4족 보행을 하고 긴 목과 꼬리를 가진 초식 공룡이며, 지금까지 지구에 존재했던 가장 큰 생명체이다. 브라키오사우루스, 디플로도쿠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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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사편찬위원회가 1995년 2월 20일에 발간한 <대구시사(市史)> 35쪽에는 '이 시기(백악기)의 대구 시역은 내륙 호수 상태였다'라는 기술이 있다. 이이화 저 <한국사 이야기> 제1 권 64쪽을 보면 '공룡이 살던 시기에 한반도에는 계속 지각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략)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는 수십 킬로미터에서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호수가 생기기도 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쉽게 이런 말을 믿지 못할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 한반도 땅덩어리 자체가 아득한 옛날에는 적도 지방에 있었는데 북상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대구 일대가 수백km에 이르는 거대 호수였다는 정도야 무에 그리 못 믿을 만큼 대단한 충격도 아니다. 게다가 고산골 입구에서 공룡 발자국이나 건열이며 연흔 화석 정도를 확인하는 일은,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잠깐의 시간만 투여하면 곧장 현장에 달려가서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믿어버릴 수 있는 간단한 작업 아닌가.
어린 자녀가 있다면 특히 고산골 입구부터 가 보자. 식당가를 지나면 나타나는 등산로 초입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찾기도 쉽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은 실물을 확인하는 것이 최선의 교육이자 참된 답사임을 잊지 말자. 몸 움직이는 일을 게을리 하다가는 "(대구)시민의 문화적 감각이 거의 상실됐다. 일반인들의 문화 수준은 고작 주말에 가족 몰고 닭·오리백숙 먹는 수준(영남일보 2010년 12월 17일, <전문가 6人, 대구 공공문화프로젝트 딴죽걸기> 지상토론의 발언 중 일부)"이라는 질타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