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집 <카스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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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는 얘긴데요. 이번 소설집을 보면서 느낀 바는 형이 조금 풀이 죽은 게 아닌가 하는 거였습니다. 여전히 발랄하고 기발하며 신명나는 상상력이지만 예전에 무쇠 도끼를 휘두르던 혈기가 좀 사라졌다고 할까요?
첫 소설집 <카스테라>를 기억합니다. 거기서는 미국이고 중국이고 아버지고 학교고 정치인이고 다 냉장고에 넣어버렸잖아요. 세상의 부패를 막기 위해 닥치는 대로 냉장고에 넣어버린 것들이 한 조각 '카스테라'로 변해 눈물을 흘리며 먹었잖아요?
이 작품집은 역시 <한겨레21>에서 '2000년대 최고의 소설집'으로 뽑기도 했고요. 장편 <핑퐁>도 있었죠.
여기선 외계인과 탁구게임을 벌여 이 세상을 다시 '리셋'시켜 버렸죠. 이렇게 세계를 뒤집어버리고 재창조하던 겁 없는 작가는 어디 갔나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정, 기대할게요 이 비루한 자본주의 사회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박민규'잖아요? 소녀시대보다 더 팬으로 다가가고 싶은 2000년대 최고의 작가인 형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되는 건가요? 탁월한 문학은 이 세계를 바라보며 한숨짓거나 키득거리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 아이디어와 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거잖아요.
얼마 전 <프레시안>에서도 한국문학을 걱정하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형에게 쓴 소리를 하셨더군요. 이번 작품집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동생이 없는 아이가 레고 블록을 가지고 자신만의 성채를 만들었다가 해체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요. 형이 '장르'를 이용해 현실과 치열하게 씨름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장르로 도망갔다가 다시 현실로 귀환하는 행위만 반복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형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이제 무언가를 제대로 보여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라는 거죠.
칭찬 일색인 문단과 언론에서 조영일 평론가가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게 아닌가 싶어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쓰다잖아요. 그런데 저는 형에 대한 이 '막연한 기대감'을 철회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형은 최근 계간지 <작가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한 적이 있죠.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에 대해 "지금은 말 그대로 습작기인 셈이니까 이렇게 이것저것 연습해 나가고, 나중에는 구분 같은 게 없어질 것 같다"면서 "그러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그때 가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잖아요. 큰 문학상들을 받고도 현재 쓰고 있는 작품을 '습작'이라 여긴다면, 스스로도 무언가 '제대로 된 한 방'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형이라면 할 수 있다고 독자로서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 이제 복면은 벗고 링에서 내려오는 게 어떨까요? 진짜 문학은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이 아니잖아요? 맨 손으로 이 세상을 붙잡고 씨름하는 거잖아요. 원시시대 돌도끼를 휘두르는 팔뚝의 굵은 핏줄처럼, 숨소리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림고수의 내공처럼, 또는 생존을 위해 회칼을 휘두르는 조직폭력배의 날카로운 눈빛처럼, 맨 몸으로 치열하게 현실과 맞짱 뜨는 게 문학이잖아요.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 작가, 화려하고 다채로운 볼거리로 승부하는 프로레슬링 작가는 너무나 많은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알몸으로 세상을 향해 덤비는 작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형이 좀 나서주면 안 될까요?